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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정다방

정다방 ; 이방인

#1.

역으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끼-익하고 힘겹게 들어오는 소리가 옆에서 자고 있는 혜숙이년 이빨 가는 소리 같아 영 달갑지 않다. 용산에서 출발하여 3시간을 달려 도착하는 고속열차는 이곳에서 하루 20번 들고 난다. 매일 나를 깨우는 열차는 아침 7시에 사람들을 태워 내달린 녀석이다. 이른 아침 첫 기차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하여 2층 창가에 턱을 괴고 쳐다 보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된 것도 벌써 1년째다. 무거운 상체를 들고, 눈을 수차례 비비적 거리고 내 이부자리를 침범한 혜숙이년 하얀 허벅지를 제자리로 돌려 놓은 뒤에야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혜숙이년은 내가 자려고 누운 새벽 3시에서 1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술에 가득 취해 내 옆으로 파고 들었다.

#2.

완연한 봄이다. 창문을 열어 심호흡을 하고, 기지개를 편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자 개운치가 않다. 과음 탓도 있으려나. 밑을 내려다보니 편의점 깍쟁이-혜숙이년과 내가 붙인 별명이다-가 물걸레로 유리에 거품을 내고 있다. 저 유리가 내 얼굴이면 좋겠다란 생각을 하며 피-식 웃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깍쟁이년이 비누거품을 남긴채 황급히 청소도구를 챙겨 계단 옆 창고로 사라진다. '저 깍쟁이는 혜숙이년 보다 더 할 거야'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에 물이 튄다. 화들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밑을 쳐다보니 편의점 깍쟁이가 고개를 까딱하곤 태연하게 유리의 거품을 물호스로 흘러 내려 보낸다. '저것이 드디어 나를 건드리는구나' 뛰쳐 내려가 머리끄댕이를 잡을 요량으로 윗옷을 걸쳐 입는다.

#3.

세상 많은 사람들이 겪는 수많은 일들은 자의가 많을까? 타의가 많은까? 둘 중 어느것이 더 많다고 한다면 그것에 따라 사람들은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가뭄에 단비가 누군가에겐 기분 나쁜 골목길 악취가 되고, 누군가에게 편안한 아파트가 누군가에겐 깊은 괴리감을 준다. 이곳에 내려온지 5년, 지하철이 들어서고 브랜드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정권이 한 차례 바뀌는 동안, 지방 중소도시의 역앞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이 역앞 골목은 술집 15개가 영업 중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정다방은 14명의 종업원, 6명의 오토바이맨들이 교대로 근무 중이고, 하루 90여잔의 커피를 팔고 배달하는데, 이곳에서 한 달 120만원을 월급으로 받고 있다. 물론, 커피만 팔아서는 벌 수 없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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