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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47

정다방 ; 여행 #25. "언니 같이 여행 안 갈래?"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연스럽게 물리치는 혜숙이년의 말이었다. 우리 둘 사이의 라면은 이미 불어 있었다. 나는 나대로 간밤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물어볼까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고, 혜숙이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젓가락으로 라면 면발을 들어올리고 후-하고 한 번 불고 다시 내려 놓기를 수 차례 반복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대치 상황에서 혜숙이년의 이 한마디는 구원과도 같았다. "그럴까?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생각해보니 여행이란 걸 가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일을 시작한지 7년이 되어가고, 그 절반을 혜숙이년과 함께 있었는데 여행 한 번 못갔다는 게 생각해보니 스스로 안쓰러운 생각도 퍼뜩 들었다. "경주. 나 경주가고 싶어" 그러더니 내내 먹.. 2013. 11. 3.
정다방 ; 슬라이드쇼 2 #22. 내 슬라이드쇼가 박진감있게 한 장이 넘어간 후 석 달이 지나갔다. 그 동안은 새로운 슬라이드를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어떤 것도 정한 건 없다. 어떤 의무감 혹은 자기 만족을 위해 다니던 도서관은 1주만에 그만 두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카페에 가서 반나절씩 커피 3잔을 마시며 문학 작품을 읽고 때때로 눈이 피로해지면 눈을 감고 머리속을 텅 비우거나 연인이 뚱하게 앉아있는 모습에 연민을 느끼거나 영업시간이 끝났다는 직원의 측은한 알림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때면 집에 돌아오는 길은 더 없이 한적해져 있었고, 바람이 나를 위로해 주는 듯 하다고 자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여겨지는 일을 2달 넘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써 볼까 하고 키패드.. 2013. 9. 17.
정다방 ; 일상이 아닌 일상 #19. 서울로 가는 마지막 기차까지 보내고 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부재중 전화는 와 있지 않다. '나쁜 년. 문자라도 보내면 어디 덧나냐'란 푸념을 하며, 아무런 반응이 없을 핸드폰 액정에 입을 삐죽 거려본다. 그리곤 이불을 펴자마자 잠이 들어버렸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 것이 아침 7시였다. 보통 이 곳에 와서는 일이 4시를 넘기는 경우가 왠간해선 없었는데 이상하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혜숙이년으로 부터의 핸드폰 연락이 와있는 것도 없었다. 다만, 다방 이모의 기둥서방쯤 되는 병식이-혜숙이년과 나는 '병따개'라고 부른다-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있을 뿐이었다. 출근 안 한 것에 대해 걱정하는 듯 얘기하면서, 나 혼자 있을 집에 찾아와.. 2010. 10. 23.
정다방 ; 슬라이드쇼 #16. 갑자기 직장을 옮긴 박대리를 다시 본 그날 박대리는 야구 경기의 승부따윈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난 내가 응원하는 팀이 9연패를 당한 것이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닐 만큼의 심정으로 그 다음주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사표를 썼다. 팀장이 꽤 놀란 눈치였는데, "며칠 좀 쉴래?"라며 나의 의중을 떠 보았고, 난 "계속 쉬고 싶어요."라고 했다. 팀원들과 마지막으로 먹은 점심값을 치르고 책상 정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온 시간이 오후 4시 였다. 회사의 잉여자원이었을지도 모르는 나는 인수인계란 것도 전혀 하지 않고 나올 수 있었는데, 잉여자원을 빼낸 인사팀에서 꽃다발이라도 준비했거나, 인사팀장이 기분을 내 회식이라도 했을지 모를일이다. 집에는 당분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 말할 .. 2009. 9. 20.
정다방 ; 하루살이 #13. 기억 하고 싶은 것들을 추억이라 하고, 기억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악몽이라 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던 그런 기억들이 되살아 나는 경우는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지난 봄 대구 버스터미널 앞 던킨도너츠에서 1,200원을 주고 사먹은 츄잉도넛과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휴가 나온 군인이 어머니를 향해 '충성'을 큰 소리로 외치던 대전 버스터미널의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시점이 그것이다. 그것은 분명 내가 한 것이고 겪은 일이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은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지금 이곳 정다방에 머문지도 3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지방 대도시를 길게는 석달 주기로 돌아다니다, 혜숙이년을 만나고부터 이곳에 계속 머물게 되었는데 '정'다방이라 그.. 2009. 9. 17.
정다방 ;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다이어트콜라 #10. 계절은 시간에 질세라 하염없이 흘러간다. 비가 몇 번 더 오더니 이내, 들이 마시는 공기가 제법 가벼워졌고, 야근을 하며 라면을 먹는데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담배가 떨어졌다며 편의점에 들어간 박대리가 건네 준 비타음료을 한 입에 털어 넣은 뒤 녀석의 오른쪽 주머니에 삐져 나온 로또 종이를 보곤 피식 웃곤, 하늘을 올려다 본다. 곧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이 어둠 속에서 먹구름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게 어쩐지 낯설어 한참을 쳐다 본다. "정말 당첨되기 바라고 하는거면, 적어도 만원 어치는 해라 임마" 내 시선을 가만히 따라가 보고 있던 박대리에게 이제 들어가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뗐다. "만원 어치를 해서 안되봐라 아깝잖아. 오천원이 적당해" 라고 대꾸하는 녀석에게 .. 2009. 8. 27.
정다방 ; 차원의 문제 #7. 황룡강과 산넘어 영산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꽤 괜찮은 풍수지리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1주일 동안 나를 설득한 혜숙이년과는 벌써 3년째 같은 티비를 보고 있고, 리모콘의 밧데리를 사러 가기 위해 한 가위바위보 수만해도 수십번이다. 생각해보면 풍수지리에 넘어간 나도 우습지만, 그런 어설픈 말로 나를 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혜숙이년도 참 귀여운 구석이 있다. 혜숙이년은 어느날 갑자기 내가 먼저 있던 곳으로 타의에 의해 흘러 들었고, 그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혜숙이년을 난 어떻게든 집에 돌려 보내려고 애를 썼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살고 있다. 그 누군가가 있기에 지금 내가 있고, 내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누군가도 역시 존재한다. 혜숙이년과 난 그런 관계다. #8. 가운데 손가락이 계속 .. 2009. 7. 10.
정다방 ; 통닭 반마리 #4. 녹음이 짙어지는 신록의 계절이다. 벚꽃이 한 차례 흐드러지게 온 거리를 휩쓸고 난 후의 거리는 곧 쨍한 초록색으로 변신한다. 금요일도 어김없이 야근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레트로 카레 비프와 맥주 한캔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몇 시간을 뒤척인 후 다음날인 토요일은 역시나 일찍 잠에서 깬다. 몸은 감기 기운에 다소 무겁지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좁은 집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다. 현관문을 잠그면서 문틈 너머로 들리는 세탁기 속 셔츠 단추의 '틱틱' 부딪히는 소리가 알 수 없는 위안을 준다. 그렇게 나선 아침 8시 골목길은 한산하다.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의 모두 새 시작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주말이면 활력을 잃고 마는데, 골목 곳곳의 구토 자욱만이 .. 2009. 7. 3.
하루키적 일상 1, 댄스댄스댄스 왠지 불온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란 생각이, 오늘 퇴근길에서 겪었던 낯뜨거운 경험을 무마시킬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무라카미상의 신작 소설이 일본에서 그야말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하늘길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난 그의 전작들을 읽으며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첫 작품으로 '댄스댄스댄스'를 택한 난, 출퇴근 지하철에서 꺼내 들고 읽은지 5일만에(중간에 주말이 끼었다) 2권으로 넘어왔다. 그게 일요일 아침이었고, 월요일 출근길에선 110페이지쯤을 읽었는데, 문제는 오늘 퇴근길 2권 140페이지, '7.국제적 콜걸 조직'이란 소제목을 가진 문단을 읽을때였다. '나는 우아하게 선물의 리본을 푸는 것처럼 그녀의 옷을 벗긴다. 코트를 벗기고, 안경을 벗시고, 스웨터.. 2009.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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