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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정다방

정다방 ; 통닭 반마리

#4.

녹음이 짙어지는 신록의 계절이다. 벚꽃이 한 차례 흐드러지게 온 거리를 휩쓸고 난 후의 거리는 곧 쨍한 초록색으로 변신한다. 금요일도 어김없이 야근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레트로 카레 비프와 맥주 한캔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몇 시간을 뒤척인 후 다음날인 토요일은 역시나 일찍 잠에서 깬다. 몸은 감기 기운에 다소 무겁지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좁은 집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다. 현관문을 잠그면서 문틈 너머로 들리는 세탁기 속 셔츠 단추의 '틱틱' 부딪히는 소리가 알 수 없는 위안을 준다. 그렇게 나선 아침 8시 골목길은 한산하다.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의 모두 새 시작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주말이면 활력을 잃고 마는데, 골목 곳곳의 구토 자욱만이 시끌시끌했던 간밤 욕구의 신경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5. 

결혼식 축의금 준다는 걸 깜빡했다. 갈 법한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대신 부탁할까 생각도 해보지만 이내 그만두고 만다. '신혼여행도 가고 부럽다'란 인사치레 말에 '개나 소나 다가는 발리로 가요'란 말로 응수했던 최대리는 35살에 두 살 연상의 형수를, 업계 2위도 아닌 3위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만났다고 사내에서 가장 친한 입사 동기 녀석이 귀뜸해준게 어제였다. 이 녀석은 최대리와 친분이 두터운 것 같아, 당연히 결혼식에 갔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결혼은 멀고먼 저 세상 얘기인냥 넘겨버리곤 하는 난. 일단 5만원 굳었단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잠시 조금 기쁘기까지하다. 주중엔 무슨 회사가 커피 한 잔 느긋하게 할 여유가 없다. 점심을 먹으라고 주어진 1시간이란 소중한 시간도 밥을 마시는 듯, 입에 터는 듯 30분만에 해치우고 제자리로 들어온다.

#6.

나 하나 살기도 버겁다. 언젠가 회사 입사 2주년 동기 모임에서, 평소 술을 잘 못하는 동기 한 놈이 얼굴이 벌개져선 탄식 비슷하게 내뱉은 말이다. 그리곤 너무나 술이 많이 취해었던지라 다음과 같은 전혀 상황이 이어지지 않는 말을 흘리곤 쓰러져버렸다. 그 녀석은 동네 만화가게 아가씨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퇴근길에 만화방 아가씨를 보기 위해 들어갔더랬다. 그 때 그 아가씨가 통닭을 먹고 있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중국닭 아니에요?", "그럴지도요. 그래도 한마리 같은 반마리가 온다구요." 술 취한 사람 취급하고 귀찮아서 말을 받아 준 건지, 정말 그 닭이 중국닭이라는 의심이 들지만 양이 많아서 만족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 얘기를 듣고 그 둘의 관계야 말로 통닭 반마리 같은 삶이지 않겠나라고 생각하곤 필름이 끊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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