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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정다방

정다방 ; 슬라이드쇼 2

#22.


내 슬라이드쇼가 박진감있게 한 장이 넘어간 후 석 달이 지나갔다. 그 동안은 새로운 슬라이드를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어떤 것도 정한 건 없다. 어떤 의무감 혹은 자기 만족을 위해 다니던 도서관은 1주만에 그만 두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카페에 가서 반나절씩 커피 3잔을 마시며 문학 작품을 읽고 때때로 눈이 피로해지면 눈을 감고 머리속을 텅 비우거나 연인이 뚱하게 앉아있는 모습에 연민을 느끼거나 영업시간이 끝났다는 직원의 측은한 알림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때면 집에 돌아오는 길은 더 없이 한적해져 있었고, 바람이 나를 위로해 주는 듯 하다고 자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여겨지는 일을 2달 넘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써 볼까 하고 키패드를 두르려도 하루에 200자 원고지 한 장 분량 채우기 힘들었다. 엑셀 프로그램과 계산기가 제공해 주는 숫자들을 슬라이드에 입력하듯 글이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 


#23.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나름 생각하고 펜을 잡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고 여겨왔다. 대학교 3학년 때 전공필수 과목이었던 실존철학 중간고사 시간에는 주어진 답안지를 다 채우고 몇 장인가를 조교에게 더 달라고 하여 더 써내려가기도 했다. 명쾌한 답안지에 좋은 점수를 주었던 교수는 나에게 B0라는 학점을 주었다는 점만 빼면 꽤나 만족스런 경험이었다. 나 스스로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아서 그렇게 길게 서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부터 였을까. 내게 닥친 어떤 상황에 대해 나는 제대로 된 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돌아가기만 했던 것 같다. 이제 부터 무엇을 할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진부한 물음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사를 그만 두면서 차를 팔았고, 정기적으로 납입되던 펀드는 해지수수료를 감수하고 다 인출했다. 퇴직금은 작년에 대부분을 써버렸다. 돈이라곤 지금 살고 있는 집 보증금 4천만원과 펀드 환급된 300만원이 전부다.



#24.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 있는 한 고기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약속을 한 친구 녀석이 늦게 오는 바람에 갈비살 1인분에 소주 반병을 먼저 비웠다. 술을 잘하지 못해서 벌써 얼굴이 벌개졌다. 결국 친구는 오지 않았다. 야근한다는 녀석을 생각해서 회사 근처로 온 건데 내일 오전까지 올려야 하는 급한 보고 때문이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날 죽이라는 문자가 왔다. 그걸로 됐다. 왠일인지 술이 잘 들어가서 한 병 반을 더 마시고 주인 할머니가 서비스로 준 천엽도 마저 숯불에 구워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은 모두가 타인에 의해 통제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이 사회고 시스템이다. 지금 난 그 시스템에서 어느 정도 이탈해 있다거나 이탈해 있다고 느끼고 있다거나 둘 중에 하나 일것이다. 좀 더 벗어나 보기 위해 여행을 가보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보았다. 별다른 구체적 성과 없이 고기집 앞의 도로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내부순환로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밤 11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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