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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정다방

정다방 ; 여행

#25.


"언니 같이 여행 안 갈래?"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연스럽게 물리치는 혜숙이년의 말이었다. 우리 둘 사이의 라면은 이미 불어 있었다. 나는 나대로 간밤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물어볼까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고, 혜숙이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젓가락으로 라면 면발을 들어올리고 후-하고 한 번 불고 다시 내려 놓기를 수 차례 반복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대치 상황에서 혜숙이년의 이 한마디는 구원과도 같았다. "그럴까?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생각해보니 여행이란 걸 가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일을 시작한지 7년이 되어가고, 그 절반을 혜숙이년과 함께 있었는데 여행 한 번 못갔다는 게 생각해보니 스스로 안쓰러운 생각도 퍼뜩 들었다. "경주. 나 경주가고 싶어" 그러더니 내내 먹지 않던 다 식은 라면을 냄비 채 먹기 시작했다. 김치를 혜숙이년 쪽으로 밀어 주었다.


#26. 


우리의 경주 여행은 착실히 준비되고 있었다. 여행 가는 얘기를 병따개가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가 와서는 나도 같이 가자고 3일째 졸라대고 있다. 병따개는 아반떼 승용차도 있고 같이 데리고 가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혜숙이년의 허락을 받는게 문제였다. 혜숙이년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라면을 먹은 날도 3일전 이야기가 되었다. 그 이후 혜숙이년은 아무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다방 일에 나갔고, 그 날 새벽 혜숙이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여행은 다방 '이모'의 특별한 배려로 2박3일이 주어졌다. 월요일 부터 수요일 까지였고, 병따개의 아반떼가 같이 가는 조건이었다. 혜숙이년과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싶었던 '이모'의 자연스런 대처였고, 이는 혜숙이년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경주까지 간 다음에, 병따개 따돌리고 택시로 돌아다니자." 이렇게 말하자 혜숙이년이 환하게 웃었다.



#27.


아침 6시부터 창문 밖으로 물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비가 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병따개가 휘파람을 불며 편의점 앞에서 물 호스로 구형 아반떼를 닦고 있었던 것다. 편의점 문 앞에는 밤 새 근무한 깍쟁이년이 팔짱을 끼고 빨리 끝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혜숙이년은 아직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누워 있다. 자기 전 준비해 둔 김밥 재료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자 혜숙이년이 잠에서 깼다. "어. 언니 김밥은 내가 쌀거야." 김밥은 자기 몫이라며 여행 준비하기 시작할 때 부터 외치던 그녀였다. "아니야. 내가 쌀테니까 조금 더 자." 그새 다시 잠들었다. 밥솥에 쌀을 올리고 재료를 썰기 시작했다. 그러곤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밖으로 나가 보았다. 편의점 깍쟁이년은 카운터에서 턱을 괴고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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