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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인터뷰

하루키 2002년 <해변의 카프카> 출간 당시 인터뷰 (2)

2002년 <해변의 카프카> 출간 당시 하루키 인터뷰 2번째 포스팅 이어집니다.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인 15세 소년 카프카 소년에 대한 이야기 부터, 작가로서의 커미트먼트에 대한 견해 등 지금까지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던 내용들을 좀 더 자세하게 푼 느낌의 인터뷰입니다. 천천히 읽어주시고, 오역/의역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 감안 부탁드립니다.



<해변의 카프카>는 어떻게 쓰여졌는가? (2)

하루키 2002년 <해변의 카프카> 출간 당시 인터뷰 (링크 클릭)


 Q: 15세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것은 꽤 이른 단계에서 정해져 있었나요?


루키: 네 미리 정해져 있었어요. 어떻게든 15세 소년을 중심으로 야야기를 움직여보자고 말이죠. 그렇게하면 이야기의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건 <해변의 카프카>를 본격적으로 쓰기 1년 전 부터 정해졌고, 그 생각을 계속 머리속에 담아 두고 있었죠. 그 소년이 제 이야기 속에서 활동하기 편한 환경을 제 의식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 간거죠. 그러면서 이제 그 환경이 모두 정비되었다고 느꼈을 무렵 부터 소설을 써나가기 시작했죠. 전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느긋한 편이랄까, 잘 기다리는 편이에요. 꼼짝 않고 말이죠.  소설은 일단 타이밍이 거의 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Q: 이전작 <스푸트니크의 연인> 종반부에 10세의 소년이 등장하는데, 그의 인상이 아주 강했답니다. 그 당근이라는 소년과 이번 소설의 카프카 소년과 관련이 있나요?


하루키: 전혀 깨닫지 못했군요. (웃음) 하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는 원래 당근이라는 소년이 나오지 않았답니다. 나온다 해도 기호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죠. 그런데 소설 전체적인 인상이 뭔가 희미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고쳐쓰는 수정단계에서 당근 소년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커지게 되었죠. 스스로 커져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소년이 전면에 나서면서 소설이 새로운 힘 같은 것을 지니기 시작했죠.  요컨대, 스미레가 사라지게 되면서 그 반대급부로 당근이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런 동력dynamism의 시프트가 있었다고할까요. <해변의 카프카>도 거기서 이어지는 부분은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전혀 의식하지는 않았고, 당근은 10세 소년이고, 카프카 소년은 15세 이니까 연령적으로도 다소 차이가 있고요.


제 소설에는 지금까지 20대 후반 부터 30대 초반의 주인공이 많았는데, 그것을 이번에 15세로 설정함으로써 소설적인 시점을 여러 방향으로 시프트 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냈다고 느낌이 들었어요. 저 스스로 많이 자유로워졌다는 감각이 있었답니다. '나 이면서 내가 아니다'라는 자립성 같은 것이 더욱 활실해졌다랄까요. 


소설을 쓴다는 작업에는 자신 속에 있는 다른 인격을 찾아가는 여행 같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신과 너무 가까운 것으로 시점을 설정해 버리다가는 현재의 자신과 찾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다른 자신이 혼탁될 우려가 있는거죠. 그런 작가 자신과 주인공과의 거리감은 꽤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 부터 지적을 받아서 알게 된 것인데요.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문체가 달라져 있었다고요. 저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그 말을 듣고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아마 전반부는 기존의 문체를 이용해서 소설을 썼을 것이고, 후반부에는 그것에 피로도가 쌓이면서 그 시점에 새로운 문체가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 작업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던 것 같은 감각은 있습니다.


 Q: 무라카미씨는 15세에 어떤 소년이었나요?


하루키: 글세요 어땠을까요. 저를 이상하게 생각한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어떤 면에서 저는 정말 평범했어요. 산에 가거나 바다에서 수영하는 등 친구들고 활발하게 어울렸죠. 그러는 동시에 이상하게 독서를 좋아하는 소년이었어요. 외아들이어서 일단 혼자가 되어 틀어박히게 되면 고독이라던가 침묵이라는 것을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죠. 오오츠키 서점에서 나온 <맑스, 엥겔스 전집>을 용돈으로 몇 권이나 사서 읽었죠. <자본론> 같은 것은 당연히 너무나 난해한 책인데,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읽다보면 제법 이해알 수 있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죠. 문장도 딱 떨어지고, 그런대로 무슨 이야기인지 느껴지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죠. 프란츠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거의 다 독파했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보통 소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책은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음악도 많이 들었죠. 모던 재즈에 빠진 것도 그 무렵이었고요. 뭐 가출은 하지 않았습니다. (웃음) 저의 경우, 강렬한 내성적인 성격과 그와 동시에 피지컬하고 이지easy한 부분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인간이란 그렇게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아요.


 Q: 소설을 쓰면서 15세때의 무라카미씨 본인의 이미지가 되살아나는 일은 없었나요? 


하루키: 그런건 없었어요. 소설가는 일단 어떤 주인공을 그리기 시작하면, 그 인물 속에 깊이 빠져들게 되거든요. 일단 그렇게 되면 그 인물에 대해 너무나 잘 이해할 수가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그 인물이 되어버리고 말죠. 예를들면 <스푸트니크의 연인>에 스미레라는 여자 주인공이 나오죠. 스무살 정도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레즈비언이 됩니다. 저는 물론 스무살의 여자도 아니고 그래서 레즈비언도 될 수 없죠. 게다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식도 전무해요. 그러나 저는 작가로서 스미레가 되어가기 때문에, 스미레가 생각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요. 그녀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할지도 알고 있어요. 적어도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뚜렷하게 알고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 답니다. 그러므로, <해변의 카프카>의 15세 소년 카프카는 15세 때의 저와는 전혀 달라요. 조금은 비슷할 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인격이랍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해변의 카프카>를 써내려가는 동안 저는 완전히 카프카 소년이 되었어요. 카프카 소년이라는 존재에 완전히 잠입한 거죠. 완전히 새로운 존재인 저를 카프카 소년의 존재 위에 겹쳐 올려 놓을 수가 있는거죠. 그것은 제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것이고, 동시에 독자에 있어서도 소중한 것이었으면 해요. 아주 소중한 것을 통해 저와 카프카 소년과 독자가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멋진 일이 있을까요? 소설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요? 


 Q: <해변의 카프카>는 두개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되는데요. 처음 부터 이런 방식을 구상하셨는지요. 


하루키: 아니요. 그런 구상이란 것은 애초에 없었어요. 그저 몇 가지 이야기를 동시적으로 쓰기 시작해서, 각 이야기들이 각기 그 이야기에 맞게 진행되어 나간 것 뿐이에요. 아무것도 구상하지 않았죠.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몇 가지의 이야기가 연결될지 등 작가인 저 자신도 알 수 없었답니다. 이야기적으로 말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단, 쓰기 시작할 때 '숲에 대해서는 쓰고 싶다'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어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이미지에서 계속되는 것으로서 말이에요. 따라서 <해변의 카프카>에도 숲 속의 세계가 나올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제가 미리 생각해 둔 것은 그 정도랍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뭐 이야기의 흐름을 제가 따라간 것 뿐이에요. 


원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속편 같은 것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소설의 종반에 숲에 들어가던 사람들의 그 후의 일이 저도 매우 궁금했으니까요. 그거에 대해 써보고 싶은 생각은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면 할 수록,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쓴지도 15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래서 전혀 다른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었는데, 역시 숲의 이미지만은 그려 보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은 제법 간절했던 것 같아요. 


 Q: 홀수 장과 짝수 장은 번갈아가며 쓰셨나요? 아니면 홀수 장은 홀수 장 나름대로 다 몰아서 쓰셨나요.


하루키: 홀수와 짝수는 어김없이 번갈아 가며 썼어요. 그러니까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와 동일한 순서로 소설을 써내려간거죠. 그렇지 않으면 소설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생기지 않아요. 물론 나중에 고쳐쓰고, 보태어 쓰고, 바꿔 놓고, 사실 관계를 맞추기는 해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이 되지 않으니까요. 예를들면, "까마귀라고 불리는 소년"의 독립된 2개의 장은 나중에 보태어 쓴거랍니다. 초고에는 없었죠. 


 Q: <해변의 카프카>는 '투명한 물' 같은 문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루키: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네요. 나카타 노인의 경우 소설 속 그대로의 모습이죠. 자연체라고 말하면 설명이 될까 싶지만, 문장이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되도록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문장력에 주안점을 두기 보다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 안에서 자유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쓴 것 같아요.  


 Q: <언더그라운드>에서 픽션이 아닌 논픽션 즉 현실의 사회와 정면으로 만났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 점과 이번 <해변의 카프카>가 어딘가에서 관계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하루키: 현실의 사회를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것만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죠. 그 정도는 사실로서 누구나 알고 있고, 저 역시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그 힘든 일의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 다는 것은 "알고 있다"라는 것과는 또 다른 별개의 차원이랍니다. 카와이 하야오 선생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인데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말이라고요. 카와이 선생님 역시 그냥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의 눈매가 확 달라진답니다. 얼굴도 다른 얼굴이 되어버리죠. 몸 전체에서 살기가 느껴질 정도에요. 그만큼 다르단 말이죠. 저는 1년 동안 줄곧 <언더 그라운드> 집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답니다. 진지하게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다는 것의 무서움을 말이죠. 그런 체험은 좀 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게다가 제가 한 일은 사람의 생사가 걸려있는 문제였으니까 말이에요.


제가 인터뷰를 한 상대의 대부분은 부지런하게 하루하루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매일 아침 만원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하고 일을 하다가 야근도 하고, 또 다시 만원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죠. 편도 2시간이나 걸린다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이미 모두 저녁까지 먹고 잠들어 있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아요. 제가 보기엔 이런 삶은 꽤나 '비인간적'인 생활이에요.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저는 "그것 참 꽤 비인간적인 생활이군요"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제게는 없는거죠. 그런 것이 사회적인 시스템으로서 현실적으로 기능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그 시스템에 관여하고 있죠. 그러한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서 직선적으로 'NO'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대로 속 시원하고 기분 좋은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적인 세계로 빠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그런 석연치 않은 위화감과 함께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요컨대, 그렇게 간단하게 흑백논리로 처리할 수 없는 위화감을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일부로서 받아들여 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저는 어느 시점 부터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 위화감을 자신 속 어느 부분에 위치시키는 가에 따라 우리의 위치가 정해진다고 생각해요. 귀결점을 어디에서 찾는가의 문제이지요. 생각하면 할 수록 어려운 문제이지만, 저도 소설을 쓰면서 이야기의 차원에서 그 '귀결점'을 모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사회와의 커미트먼트란 것은 구체적인 정치참가를 한다든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거에요. 소설가로서 사회의 구조 속에 유기적으로 끼워지고 actual하게 기능하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도 사회적 커미트먼트의 하나의 중요한 형태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일 수 있는 것이죠. 아사하라 쇼코가 설파한 것과 같은 매혹적이면서 위험성을 내포한 이야기성에 대항할 만한, 다른 가치를 지닌 이야기성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 소설가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요. 그런 시점에서 사물을 보지 않는다면, '현실적인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소설가에는 정당한 정치성, 사회성이 없다'라는 극단적인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사회성이라는 의미에서, <해변의 카프카>에는 그런 것이 단순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신화성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키: 저는 사물을 논리적으로, 언어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원래 잘 못하는 편이에요. 못한다기 보다, 해봐야 소용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원래 머리도 그다지 좋지 못하고요. 예를들어 <언더그라운드> 작업과 관련해서 그 작업이 제게 준 것의 무게나 의미를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에요.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상당히 위선적인 것이 될거에요. 다소간의 말만 남게되고, 독자들의 마음까지 닿지 못할 거에요. 신문사 인터뷰 중에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제 속에 허무감과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지요. 무력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은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이란 아마도 그런 것들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새로운 곳으로 옮겨 놓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음, 다른 측면으로는 이야기적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즉 거기에 놓여진 vision을 픽션이라는 총체에 확 새겨 놓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예로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레인맨이 바닥에 흩어진 구슬을 셀 때, 우선 거기에 있는 풍경을 움직이지 않는 vision으로 자기 머리 속에 확 새겨 놓는거지요. 하나 씩 숫자를 세지는 않고요. 소설가는 그것과 같은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요컨대 사물을 다른 회로로 던져 버리고, 그 회로가 가진 특정한 생리를 통해서 사물을 이해하죠.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이 픽션화라는 것이에요.


신화라는 것도 요컨대 다른 동시적인 회로라고 할 수 있어요. 신화라는 원형회로가 우리들 속에 원래 셋팅되어 있고 우리는 가끔식 그 원형회로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사물의 vision을 이해하는 거죠. 그러니까 픽션은 어떤 경우에는 신화의 영역에 딱 맞게 들어가 버려요. 이야기가 근원적인 이야기로서의 기능을 다하면 할 수록 그것은 더욱 신화에 가까워지는거죠. 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분열증적인 세계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런 뜻에서 제 소설은 기본적으로 해석하기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 소설에 관한 해설서가 많이 나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런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되지않을까요. 뭐 자만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 속에 있는 원형 같은 것을 하나씩 분석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돌처럼 삼키면서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결국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쓰고 있는 거지요. 그런 감각이 어느 정도까지 독자에게 전해지고 있는지 저로서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Q: 무라카미씨에게 있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하루키: '소설을 쓴다', '이야기를 쓴다' 라고 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경험하지 않은 일의 기억을 더듬는다"라는 작업이에요. 좀 더 쉽게 말하면 당신이 미경험의 롤플레잉 게임을 한다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게임을 프로그램한 사람은 당신 자신인 거에요. 그러나 그 기억은 게임을 하고 있는 당신의 인격에게는 없는 것이죠. 다른 한 편으로는 게임을 프로그래밍한 당신의 인격은 게임을 하지 않아요. 그런 꽤 분열적인 작업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일을 모르고,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일을 몰라요. 그런 작업이 명확하게 분열되면 될 수록 거기서 태어나는 이야기는 설득성을 가지게 됩니다. 요컨대 당신 속에 있는 원형에 더 가까워진다는 뜻이 될 수도 있어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요. 


물론 저의 경우이지만, 처음부터 이야기의 결론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되지 않아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부터 이야기를 세워 나가는데 의미가 있는거죠. 결말이 뻔한 스포츠 시합과 같이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꼭 의미있는 결론에 다다를수 있다는 확신은 있어요. 그러니까 그곳에 있는 결론에 어떻게 다다를 것인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지요. 


 Q: 무라카미씨에게 단편과 장편은 어떻게 다르고 각각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는 처음 반년 동안 초고를 쓰고, 또 반년을 들여서 고쳐 썼어요. 머리 부분 부터 다 고쳐 쓴 것이 여섯번 정도였죠. 즐거웠지만, 제법 힘든 작업이었죠.  그렇게해서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을 편집자에게 보여주고 OK를 받으면 교정쇄로 만들지요. 그 이후에는 철저하게 세부를 고쳐써요. 이것도 일단 시작하면 끝이란게 있을 수 없죠. 제가 원래 고쳐 쓰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나 하고 있는데 어쨋든 어딘가에서는 끝을 맺어야 하잖아요. 얼마든지 고쳐쓸 수 있지만, 끝을 맺기에 적당한 곳이 있고, 그것을 잘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을 일이죠. 단편이라면 원칙적으로 어디까지나 고쳐쓰면서 완벽한 문장으로 만들어 가야 해요. 번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얼마든지 닦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장편 소설의 경우 문장을 닦아 내는 작업을 너무 많이 하다가는 독자에게 읽기 어려운 문장이 되고 말아요. 장거리니까 적당하게 훅하고 힘을 빼는 부분도 필요한거죠. 


저는 챈들러의 <롱 굿바이>를 셀 수 없을 만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데 지금도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부분이란 꽤 조잡하고 쓸데 없는 부분들이에요. 장편소설엔 그런 부분이 필요한거 같아요. '뭐 괜찮지'라는 식의 미지근한 부분 말이에요. 좋은 장편 소설은 독자와 인간적인 꽤 깊은 관계를 가지는 부분이 있고, 거기서는 사람과 같이 어느 정도의 결점이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결점만 많으면 상대를 안 해 주겠지만요. (웃음)


비치 보이스 라기 보다는 브라이언 윌슨의 <pet sounds>도 그렇지요. 오래 듣고 있으면 '이거야말로 명곡!'하는 트랙 보다는  '뭐야, 이거' 하는 트랙이 이상하게 머리에 남아서 개인적인 애착을 느끼게 되죠. 제 소설도 그런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잘 모르겠지만, 이 미지근한 부분이 난 좋아'라는 식으로 말이에요.


 Q: <해변의 카프카>를 탈고하고 나신 지금 어떤 느낌이신지요?


하루키: 더 앞으로 나갈 수 있겠다라는 느낌이 있어요. 이 느낌은 지금까지 장편을 쓸 때 마다 느껴 온 거지만, 여전히 아직 더 나아갈 여지가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을 앞으로 채워갈 수 있겠다라는 믿음이요.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만족감은 있지만, 충분히 납득하지는 않아요. 언젠가는 더 큰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제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제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제법 잘 움직여 줬다고 생각해요. 카프카 소년도, 나카타 노인도, 오시마 상도, 호시노 군도, 사에키 상도, 사쿠라도 모두 각각 피지컬하고 독립적으로 잘 움직여 줬어요. 그런 실감이 있답니다. 예를 들면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나'와 '쥐'의 분리성이라는 부분이 그리 확실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가끔씩 혼탁하고 명확하게 나눠서 쓰지 못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보이스의 특정성이 딱 알맞게 구분되었던 것 같아요. 오디오적으로 말하면 악기 소리의 분리가 선명하게 되어 있는 느낌이죠. 그로인해 이번 소설의 '중층성'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양을 쫓는 모험>에는 그 나름의 좋은 맛이 있고, 그것은 아마도 그 시기를 지나서는 낼 수 없는 맛이겠지만, 소설가로서 언제까지나 그것을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것이 가능하게 된데에는 역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을 춘다>의 존재가 컸어요. 이 연작 소설을 통해 철저하게 여러가지의 보이스를 나누어 쓰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진행했거든요. 그게 일단 제가 의도한 방식으로는 기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저 스스로의 자신감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앞으로 소설 속에서 쓰고 싶은 것은 역시 '악'에 대해서에요. 악이라는 것의 형태나 존재 방식을 여러 각도에서 쓰고 싶어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은 소설의 스케일이나 완성도로 보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처럼 압도적이지는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악이라는 것이 여러가지의 형태를 취하면서 대지 속에서 스물스물 배어 나오는 모양이 참으로 리얼하고 면밀하게 그려져있죠. 그런 것을 저 나름대로 침착하게 시간을 들여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답니다. 


<태엽감는새>에서는 와타야 노보루나 보리스 같은 악의 세계에 속하는 인간들이 나오지요. 그들이 표상하는 악의 영역 같은 곳도 나오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상징적이면서도 세부적으로 리얼하기도 한 악이란 것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많은 경우 악이란 것은 그것 자체가 자립한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욕심이나 겁, 상상력의 부족과 같은 그런 자질들과 연결된 것이에요. <악령>을 읽으면 그런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답니다. 사소한 부정의식의 집적 위에 거대한 악이 자리잡고 있죠. 


소설가로서 최종적으로 쓰고 싶은 것은 역시 '총합 소설'이에요. 총합 소설이라고 하면 좀 어려운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죠. 그 소설이 총합 소설로서의 하나의 달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거에요. 주제 넘는 말이지만, 제 목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소설을 언젠가는 쓰고 싶다는 거에요. 욕심이 많지요. (웃음) 여러 인물들이 각각 이야기를 가지고 모여와 그것이 복합적으로 뒤엉키면서 발열하며 새로운 가치가 탄생한다. 독자는 이 모든 과정을 동시에 목격할 수 있게 되죠.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총합 소설이에요. 물론 어려울거에요. 


저는 <태엽감는새>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하고 있고, 제 작품군에 있어서도 하나의 마일스톤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아직 제가 생각하는 '총합 소설'까지는 되지 못하고 있어요. 아직은 총합 소설로 가는 도상에 있는거죠. 여러가지 보이스가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뒤엉키면서 발열한다는 지점까지는 가지 않았죠. 왜냐하면, 한 필드 상에 여러가지 보이스가 나타나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데, 결국 그 위치가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여러 인물들이 여러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모였는데, 역시 1인칭 '나'라는 화자의 존재감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의 보이스가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부분이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죠.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홀수 장과 짝수 장을 1인칭과 3인칭으로 나눠서 쓰고 있답니다.  


 Q: 끝으로 독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하루키: 이번 소설 <해변의 카프카>는 - 다른 소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번 작품은 - 저는 별로 해석 같은 것을 하고 싶지 않아요. 말로 하나하나 해석해 버리면 많든 적든 거짓이 될 것이고 의미도 없어질테니까 말이에요. 물론 이건 작가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요. 저로서는 독자 여러분들이 해석 같은 것 없이 하나의 이야기의 총체로서의 정경을 되도록 이 상태 그대로의 형태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질문을 받아서는 저도 잘 모를 수 있으니까요. (웃음)  


제가 하루키를 처음 접하게 된 <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귀한 인터뷰였습니다. 글세요, 저의 경우엔 <해변의 카프카>야 말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친절한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마지막 하루키의 말은 그걸 알고 너스레를 떤 것이 였을지 나중에 만나게 되면 물어 보겠습니다. :D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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