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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정다방

정다방 ; 일상이 아닌 일상


#19.

서울로 가는 마지막 기차까지 보내고 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부재중 전화는 와 있지 않다. '나쁜 년. 문자라도 보내면 어디 덧나냐'란 푸념을 하며, 아무런 반응이 없을 핸드폰 액정에 입을 삐죽 거려본다. 그리곤 이불을 펴자마자 잠이 들어버렸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 것이 아침 7시였다. 보통 이 곳에 와서는 일이 4시를 넘기는 경우가 왠간해선 없었는데 이상하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혜숙이년으로 부터의 핸드폰 연락이 와있는 것도 없었다. 다만, 다방 이모의 기둥서방쯤 되는 병식이-혜숙이년과 나는 '병따개'라고 부른다-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있을 뿐이었다. 출근 안 한 것에 대해 걱정하는 듯 얘기하면서, 나 혼자 있을 집에 찾아와 어떻게 한 번 자볼까 하고 전화한 것이 분명하다. 창문을 열자 완연한 가을의 찬 기운이 얼굴 전체에 그리고 명치를 타고 가슴골로 밀려들었다.


#20.

"아. 춥다 추워. 벌써 일어났네?" 온 몸에서 술 냄새와 구토냄새가 뒤섞인 블랙 투피스를 입고, 한 손에 아래층 편의점 봉투를 들고 나타난 혜숙이는 흡사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돌아온 장군 같거나,  밤샘 회식 후, 과자를 사들고 귀가한 아버지 같았다. 입술에 몇 번이나 덧 발랐을 새빨간 루즈는 덧 바른 만큼의 사내 입술의 흔적의 층이 짙게 깔려 있고, 발 뒤꿈치는 전쟁터에서 맨발로 숱하게 문드러져 검게 그을려 있었다. "에그 일찍도 들어온다. 뭘 사들고 와?" 맘 같아선 지난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물어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혜숙이년이 사들고 온 세븐일레븐의 숫자 7이 새겨진 봉투를 보니 갑자기 허기가 느껴져서 인지도 모른다. "히히, 럭키 세브-은!" 이렇게 외치며 팔꿈치를 겨우 접을 정도로 봉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그리곤 꺾어 신고 있던 힐을 내팽개치듯 벗어버리고, 스타킹을 도구 삼아 미끄러지며 주방으로 향했다. 

#21.

럭키 세븐 봉지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을 보고 '피식'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간밤에 몰래 먹은 라면 두 개가 나왔고, 뒤이어 계란 6개들이 한 팩, 양파 반 쪽, 콩나물 한 봉지 그리고 소주 한 병. 이렇게 럭키 세븐 봉지는 제 소임을 다하고 구겨졌고, 지난밤 일을 묻지 않은 것 처럼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온 이유에 대해서도 물을 수 없었다. 혜숙이년의 라면 끓이는 일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잘 짜여진 시나리오 대로 테이크가 진행되듯 금새 만들어졌다. 계란은 노른자가 쏠리는 일 없이 적당히 라면 면발위에 먹음직스럽게 올려져있고, 양파와 콩나물의 양도 어느쪽이 많지 않고 아주 적절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래 묵혀있던 떡의 익음 정도가 딱 좋아 쫄깃해보이는게, 내가 간밤에 먹었던 라면의 떡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맛있지? 맛있어야 되는데." 너무 맛있어서 대답을 못한 이유보다, 혜숙이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한 연유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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