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인터뷰는 하루키가 1992년 뉴욕타임즈에서 마련한 미국 시나리오 작가 제이 맥이너니와의 인터뷰입니다. 이 인터뷰의 취지는 일단 영국에서 창설된 국제적인 작가 클럽인 국제 PEN 클럽에서 뉴욕타임즈와 함께, 미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그 예로 하루키는 미국 문화에 대해 해박한데, 반대로 미국의 작가들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학작품에 대해 무지하다는 걸 들고 있네요. 이런 문화 교역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격차가 얼마나 좁혀졌을지 인터뷰를 보시죠. 마침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미국에 체류중인 하루키를 초청해 인터뷰를 한 것 같습니다. 단순 신문기사용 인터뷰가 아닌, 대담 형식의 인터뷰라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모두 말을 많이 하는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제이 맥이너니: 예전에 <I hate Hamrit>이라는 연극을 봤는데요. 그 연극을 보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서 부친을 살해하는 느낌의 불안한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에게 깊게 각인되었다랄까요. 그리고 나서 무라카미씨의 작품을 읽게 되었는데, 제가 받은 첫느낌으로만 말씀드리면, 무라카미씨는 미시마 유키오 작가를 계승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게되었답니다. 이 느낌은 무라카미씨 작품의 미국에서의 비평이나 기사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채 받은 느낌이긴 했지만요. 무라카미씨와 미시마 유키오 작가는 일본인 작가라는 공통점으로 유사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유사점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죠.
이를테면 미시마 유키오 작가의 작품은 낭만주의, 영웅감성, 지적이고, 심미적인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삶의 끝은 극단적인 국가주의 성향을 띄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무라카미씨의 작품 역시 회의적인 현실주의적이라는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씨는 큰 주제를 다루지 않죠.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 처럼 전형적인 중산층이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특별히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작은 마당에는 토요타 코롤라가 주차되어 있죠. 그러다가 놀라운 일이 생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여자친구가 자살을 한다던가, 양사나이 속으로 되돌아간다던가 말이에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코끼리가 하늘로 사라지기도 하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의 주인공들 같기도 합니다. 그런 주인공들이 나오는 무라카미씨의 히트작 <노르웨이의 숲>은 4백만 부가 팔렸는데요.
하루키: 사실 정확히 말하면 2백만부입니다. 일본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두꺼운 책을 싫어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미국에서의 한 권으로 출간된 것과는 달리 두 개의 권으로 나누어서 출간되었죠. 그래서 1권과 2권을 하나의 책으로 계산하면 2백만부가 맞는 셈이되는거죠. 일본 독자가 두꺼운 책을 싫어하는 이유는 만원 통근 열차에서 두꺼운 책을 들고 읽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보통 하드커버가 나온 뒤 몇 년뒤에 페이퍼백이 나오는데요. 하드커버로 2백만부가 팔렸다는 것 자체도 저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제이 맥이너니: 아 그렇군요. 4백만부는 취소하겠습니다. 4백만부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인기있는 작가라는 것은 틀림없을 겁니다.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의 어떤 참여를 요구하는 것에서 모두 벗어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서의 급진적인 학생들과는 달리 그들은 개인의 일에 치중하는 모습이죠. 그들은 사회의 어떤 문제에 따라 일상이나 환경이 뒤집어 지며 요동치는 것을 원치않죠. 그들은 장식용 술 처럼 별탈 없이 흘러가길 원할 뿐입니다.
이렇게 사회의 그룹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의 일본 독자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대로 이런 주인공들의 태도가 모든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아닐테죠. 그런데 분명한 것은, 무라카미씨 이전의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지루한 탐미주의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뻣뻣한 귀족주의의 다니자키 준이치로, 고통스러운 젊은 남자 미시마 유키오에 둘러쌓여있다가 일종의 휴식을 독자들에게 제공해주는 느낌도 듭니다.
무라카미씨가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할 즈음, 의식적으로 미시마 유키오 같은 이전의 선배 작가들과는 다른 혹은 대항하는 작품을 쓰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확실히 제가 읽어본 많은 일본의 젊은 작가들의 경우 이전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루키: 일본에는 시대를 앞서나가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던 작가가 3명 있었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미시마 유키오, 아베 고보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입니다. 이 3명의 작가들 중 아베 고보를 최고라고 생각하고요, 미시마는 그 반대에 있습니다. 전 미시마의 모든 작품을 읽을 때면 매우 힘이 들었어요. 그래서 좀 전에 말씀하신 저와 미시마 유키오가 유사하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전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 같은 저 앞 세대 작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혹은 그들을 뛰어넘으려는 의식같은 것을 지니고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혹은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전 이전 세대의 작가들과는 관계 없이 작가로서의 작업을 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작가로 데뷔한 29살이 되기까지, 스스로의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일본 작가의 소설을 읽은 적은 없습니다.
제가 10대였던 1960년대 고베에 살고 있었는데요. 그때 제 스스로 일본 문학에는 크게 흥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전 스스로 일본 소설들은 읽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또한 부모님 두 분 모두 일본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였거든요. 그런 부모님에 반해서 멀리했다고 말해도 틀린말은 아닙니다. 당시 미국 문화는 매우 역동적이었어요. 전 그런 미국의 음악과 TV쇼, 자동차, 옷 등 거의 모든 것들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건 미국이라는 나라를 숭배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건 밝고 반짝반짝거리는 마치 환상의 세계와도 같은 것이었죠. 우리는 모두 환상의 세계를 동경하곤 합니다. 제가 13살, 14살이었던 당시에는 그런 환상의 세계를 잘 보여주던 나라는 미국이었어요. 그리고 전 외아들인데요. 그래서 혼자 방안에서 미국 재즈와 락앤롤을 듣고 미국 TV쇼를 보고 미국 소설을 읽었답니다.
당시 고베는 많은 중고서적이 있던 꽤 큰 항구 도시였는데요. 매우 저렴하고 쉽게 중고 페이퍼백을 구할 수 있었답니다. 중고 서점에 가는 것은 마치 보물상자를 여는 것과 같았죠. 전 대부분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나 공상과학 소설을 읽었답니다. 레이먼트 챈들러, 에드 맥베인, 미키 스필레인 같은 작가들 말이에요. 그 후에 스콧 피츠제럴드와 트루먼 카포티를 발견했죠! 그들은 모두 일본 작가들과는 달랐어요. 그들은 제 방에 이국 문화와 환상의 세계로 통할 수 있는 작은 창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저의 이런 경험은 아르헨티나 작가인 마누엘 푸이그씨와 많은 부분 닮아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흥미, 동경을 바탕으로 소설 작품을 써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할리우드의 영향을 받은 그런 그의 느낌을 저도 알 수가 있답니다.
제이 맥이너니: 제 생각에는 젊은 세대의 일본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쟁 이후의 작가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국제적인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즉 그들은 글을 쓰면서도 영국의 마틴 에이미스나,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드 카를로 같은 작가들과도 작업을 통해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거죠. 국제적인 대중 문화를 통해 공통의 관점에 대한 레퍼런스를 공유하는 것이죠. 리오넬 트릴링은 대중문화를 하위문화라고 지칭했지만, 누구는 더 적게 누구는 더 많이 각자의 적합도에 따라 공통의 대중문화를 수용하여 이탈이아나 스웨덴, 일본 그리고 미국의 작가들에게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무라카미씨를 비롯한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은 서양 문화의 수준에 대한 의식이 이전의 선배 일본 작가들과는 다른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서양문화의 높고 낮은 수준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죠. 예를들어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가 같은 경우에 누군가 서양 의복을 입고 베이스 드럼 소리를 듣는 다면, 이것은 일본 전통 문화가 오염된다거나, 혼이 섞여 버리는 불길한 징조로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무라카미씨의 작중에서는 동시대 작가인 요시모토 바나나나 코바야시 쿄지, 무라카미 류 같은 작가들과 같이 이탈리아의 극작가 로시니나 비틀즈나 모두 대등하게 작품의 백그라운드로서 존재합니다. 즉, 세계 대중문화는 물론 유럽의 예술 문화까지 세계 공통어로서 확장을 시켰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미국의 여느 작가들보다 눈에 띄게 높은 일종의 성과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런데 미국의 작가들은 반대로 이런 대중 문화들 영화, TV, 락앤롤을 그냥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영향을 최소화할지 혹은 여러가지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작가로서 상위 문화를 보호하는 입장에서의 특정 자의식이 있다랄까요. 그런데 무라카미씨와 같이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은 요즘 일본 작가들에게서는 그런 자의식을 찾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전 이 이유가 역설적이지만 섬나라로서의 일본인들이 지속해서 느끼는 고립이라는 느낌 혹은 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일본의 위대한 하이쿠 작가인 부손과 바쇼를 뛰어 넘어 혹은 뒤집어야 한다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와 기타 다른 나라와의 문화적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으로 보입니다. 즉 뉴욕의 매디슨가와 할리우드, 락앤롤은 작가 자신의 관심과 세계적인 표현에의 의지 등을 발휘할 수 있는 여러가지 레퍼런스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무라카미씨의 <노르웨이의 숲>에는 비틀즈 외에도 - 물론, 책 제목 자체가 비틀즈의 음악에서 나온 것이고요. -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샐린저, 챈들러 등 많은 일본 외의 작가들이 등장합니다. 그에 반해 일본인 작가는 전체 책 내용 중에 한 명이 나오죠. 스스로를 거부한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 입니다.
<태엽감는새>에서는 주인공이 스파게티를 요리해서 먹고, 점심은 맥도날드에서 해결합니다. 그는 아침에 주세페 베르디를 듣고 로버트 플랜트를 듣죠. 그리고는 렌 데이튼을 읽습니다. 그의 아내와 TS 엘리엇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인공의 이름만 조금 바꾸면 이 이야기는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죠.
하루키: 네 저 역시 말씀하신 내용이 모두 맞다고 생각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제 소설들은 무국적성을 띈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국적성임을 미리 알고 일부러 장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정말 무국적성을 띈 소설을 쓰고 싶었으면 배경을 아예 미국으로 설정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경을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로 했더라면 무국적성을 띄게 하기 위한 장치로서 더 용이했을 겁니다. 당신도 알거라고 생각되지만,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일본이라는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겉에 둘러쌓인 것들을 하나 둘 벗겨내고 난 뒤 일본인의 본성이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모든 부분이 '일본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 소설은 앞으로 계속 이런 경향을 더 강하게 띄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시마 유키오 작가와는 많은 부분 다릅니다. 전 일본인 작가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이죠. 제가 미국 체류 기간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고 항상 듣는 질문이 다음 소설은 배경이 미국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에 대답은 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입니다. 물론 앞으로 다시 미국에서 얼마간 지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와중에도 일본의 밖에서 일본 사회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그것이 작가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체성을 더욱 더 규정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영어 단어 'identity'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없는 걸 아십니까? 그게 제가 계속 'identity'를 영어로 얘기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영문학에 심취해 있었던 10대 시절, 제가 영어로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일본어로 글을 쓸 때 보다 훨씬 더 제가 느낀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제 영어 실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죠. 어떻게든 일본어로 소설을 쓰는게 가능해질 때 까지 그렇게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제가 29살이 되기전까지 소설을 쓰지 못한 이유였죠. 저만이 가진 제가 창조해낸 새로운 일본어로 소설을 써야만 했기 때문이에요. 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일본어 체계를 가지고 소설을 쓸 수 없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창조해낸 소설을 쓰는 일본어 스타일은 저만의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이먼트 챈들러는 1960년대 저의 영웅이었어요. <롱굿바이>를 십수번 읽었답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죠. 그들은 물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위하는 괜찮은 삶을 살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일본 사회는 집단 의식이 매우 강하여 독립적으로 생활하기가 매우 힘든 사회입니다. 예를들어, 도쿄에서 아파트를 알아보는데 부동산 업자는 제가 회사에 속하지 않은 자영업자로서 작가라는 이유로 저를 신뢰하지 않았죠.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 중에는 더욱 더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하죠. 그러나 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고, 고립감에 고통도 받게 됩니다. 젊은 독자들이 제 작품을 지지해주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이 맥이너니: 무라카미씨의 작품 <양을 쫓는 모험> 같은 경우에는 당신의 기존 작품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주인공들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고전에 나타나는 주인공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인상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었는데요. 그는 회의적이고 냉소적이며, 사회의 중심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지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양을 쫓는 모험>은 무라카미씨 스스로의 얘기에서 시작되었나요? 소설 속에서 주인공 '나'는 계속해서 미스테리한 양을 찾아 나섭니다. 이 양은 소설의 사라진 플롯에 대해 정보를 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루키: 어떤 사람들은 '큰 양'이라고도 부르더군요. 전 이 소설이 크게 특이한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문체에 있어서는 챈들러의 탐정 소설들에서 일부분 빌려 왔습니다. 제가 그 책을 쓴지 10년이 지났는데요. 그동안 제 소설 작업 스타일도 많은 부분 변했다고 생각해요. 당시 제가 <양을 쫓는 모험>을 쓰기 위해서는 챈들어의 문체를 빌려와야만 했어요. 물론 챈들러의 스타일을 일본어로 변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단 문화적인 시작점 부터 영어와 일본어는 확연히 다르죠. 그러나 전 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언어를 변환해가는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제 아이디어를 갱신했습니다.
제 동시대 속에서 저는 일본어의 새로운 한 종류를 창조해 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당신이 새로운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그에 맞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내야만 해요.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가는 일본어는 영어나 다른 서양의 언어와는 완벽하게 다르다고 했죠. 일본어는 서양어에 비해 스페셜하고 우월한 면도 가지고 있고, 이런 일본어의 아름다움은 매우 신중하게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이런면에서 그는 민족주의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자키는 매우 명석하고 뛰어난 작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일본어에 대한 그의 견해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언어가 다른 언어의 우위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제이 맥이너니: 하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가의 일본 언어의 우수성에 대한 견해는 과거부터에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나왔던 내용이기도 해서 크게 특별한 언급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 문화에 대한 논쟁은 항시 일본의 독특성에 대한 관점에 집중되어 온 경향이 있는데요. 당신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일본에 대해 어떤 연구 활동에 있어서 일본의 특징, 언어, 혈통은 독특하고 뛰어나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있어서 일본 언어의 고유한 특징 때문에 번역의 장벽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나라에 비해 일본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느낌은 때로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한 종류로도 받아들여 질 수 있죠. 일본이란 나라는 특별한 곳이라는 느낌으로요. 하지만 무라카미씨와 동시대의 일부 작가들의 경우에는 위의 이런 일본 문화의 특수성, 우수성에 대한 견해를 거부하는 듯한 작업들을 보여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 많은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워낙 독특해서, 다른 외국인들이 그 언어의 본질이나 아름다움, 미묘한 것들을 잡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외국인이 자신이 일본어의 본질을 캐치해냈다고 말한들 믿지도 않을거고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큰 이유는 일본은 2차세계대전 종전 후의 짧은 미군 점령 시기를 제외하면 외국의 점령이나 통치를 받지 않은 비교적 문화적으로 지속해서 동종의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죠. 일본 문화는 다른 나라의 문화에 위협 당한 적이 없는 거죠. 그런 이유로 일본어는 고립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약 2,000년 가까이 그런 상태였죠. 이런 이유로 일본인들은 자신의 언어에 대해 독특하고, 본질적이고, 구조적이고, 기능적이라고 확고하게 믿는거죠.
전 이런 일본 문화, 언어에 대한 확고하고 완고한 생각을, 젊은 작가 몇몇이 깨뜨리고 파괴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리스에서 2년여 살았던 적이 있는데요. 지내던 섬이 매우 작은 섬이었는데 저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전 닛산 차를 몰아요. 아주 좋은 차죠." 1주일 후 그 얘기를 듣는 것에 지쳐있을 때쯤, 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닛산, 카시오, 세이코, 혼다, 소니가 전부라는 것을 알게되었죠. 그들은 일본의 문화나 문학, 음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전 일본이 오랜 시간 소중하게 지켜온 '고립'을 깨뜨리는 무언가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젊은 작가들 중 일부는 이미 우리의 언어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나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본 언어의 아름다움이나 미시마가 구사한 미묘함의 성과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합니다. 동시대의 작가들과 함께 고립의 장벽을 깨부수고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 그 동안 말하지 못했던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의 교류를 위해서 중간지점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부심을 가져야하는데, 그 자부심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서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어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더 확장시키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문화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궁금해합니다. 이제는 일본 사람들 자신을 돌아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와 다른 문화 단체들은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가부키를 소개하는 활동은 합니다. 물론 가부키나 노와 같은 예술은 매우 뛰어난 전통입니다만 모두 과거의 문화에 속한 것들입니다. 지금의 일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죠. 저에게 노나 가부키는 매우 지루한 형태의 예술이에요. 아마 대개의 일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노나 가부키를 좋아하는 외국인들까지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이 맥이너니: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것들 예를 들면, 가라데나 꽃꽃이, 그림 같은 것들을 배울 때는 밑바닥 부터 하나하나 시작해 점차 발전해 나가는 방법으로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라데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제 사범은 실제 무술을 가르치기 전에 2주간 주차장 청소를 시켰었답니다. 일본에서 캐비네트리를 배운 제 친구는 무려 6주 동안 끌을 날카롭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만 연습했다고 해요. 일본의 분위기가 이런데, 일본 문학계에서는 기존 일본 전통을 깨뜨리는 작업을 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 무라카미씨에게 반감을 가질 것 같습니다. 전통을 고수하고 싶어하는 나이가 많은 평론가들은 당신의 작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하루키: 간단합니다. 그들은 저를 좋아하지 않아요. 일본 문학계는 여러 세대간의 다툼이 있습니다. 네, 옛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다툼이겠죠. 그들은 마치 동유럽의 공산국가의 지도자들 같아요. 일본 문학계는 상당히 강한 계급 구조를 여전히 견지하고 있죠. 당신이 얘기한 것 처럼 밑바닥에서 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계층을 잘 따라가 어느 순간 문학계의 최고봉에 올랐을 때는 다른 작가들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들 문학계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문학상을 안겨주죠. 그러나 정상에 있는 작가는 밑에서 올라오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 그들은 일본 문학이 쇠퇴기로 접어들었다고 한탄했죠. 하지만 당시 일본 문학은 쇠퇴기가 아니라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죠. 이전 세대의 작가들은 매우 폐쇄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정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를겁니다.
*이상 하루키의 1992년 인터뷰/대담을 마칠게요. 인터뷰어의 멘트가 이렇게 많은 인터뷰는 처음이었습니다. 꽤 수준 높은 이야기에 시간이 꽤 소요되었네요. 하루키가 일본 문학계, 비평계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하루키가 일방적으로 무시하는)건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관해 가장 심도있게 하루키의 마음 속 얘기를 한 인터뷰가 아닌가 합니다. fin.
'하루키 인터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루키 2002년 재팬타임즈 인터뷰 "경계선에 선 작가" (0) | 2016.10.09 |
---|---|
하루키 2002년 일본국제교류기금 수상 소감 (2) | 2016.09.15 |
하루키 2005년 호주 The Age.com 인터뷰 (0) | 2016.07.31 |
하루키 2009년 이스라엘 예디오트 신문 인터뷰 (0) | 2016.07.17 |
하루키 1999년 '간사이 타임아웃'紙 인터뷰 (0) | 2016.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