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2010년 <노르웨이의 숲>이 영화화 된 이후 좀 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감독과 연기자들을 중심으로 2018년 부터는 꽤 잦은 빈도로 재탄생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2018년 <하나레이 베이>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 이어 오늘의 포스팅 주제인 <드라이브 마이 카>까지 이어졌습니다. 영화화된 작품들을 보면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노르웨이의 숲>을 제외하면 모두 단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2018년 이후만 본다면 특정 시기의 작품이 영화화 된다기 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 초 부터 최근 까지 작가 활동 전 시기를 아우르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카>는 칸느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하루키 원작 영화로서 의미있는 성공을 거두 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최근 소식을 보니 오스카까지 노린다고 합니다. 영화 <기생충> 이후의 오스카의 행보를 볼 때 가능성이 낮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루키의 모든 소설과 영화화된 작품까지 본 저로서 이번 영화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개봉 주말 아침 극장으로 달려갔는데요. 영화 <아사코>를 통해 처음 알게된 감독의 연출이라는 것과 러닝 타임이 꽤 길다는 것 정도 그리고 하루키의 원작을 한 번 더 읽었고, 지인 하루키스트에게 들은 <바냐 아저씨>의 줄거리를 대략 알고 가면 좋을 것 같다라는 배경 지식만 가지고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영화는 마치 연극 처럼 4개의 막으로 구성된 설정을 가지고 진행됩니다. 첫번째는 한 때 유명했던 배우이자 현재 연극계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 가후쿠와 방송국 작가로 일하며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외도를 통해 본인의 작품의 영감을 얻으려고 하는 아내 오토가 중심인 도쿄, 두번째는 아내가 죽은 2년 후 <바냐아저씨>의 연극 무대 연출을 제안 받고 방문하여 체류하게되는 히로시마, 세번째는 가후쿠와 히로시마에서 처음 만난 그의 운전사를 하게 된 미사키의 고향을 찾아가는 홋카이도, 마지막 네번째는 포스트의 후반부에 다시 언급 하게 될 한국의 부산입니다.
1막: 과거를 부정한 채 상처 뒤에 숨어 아내를 잃은 남자 가후쿠 (도쿄)
한 때 잘나가던 영화배우였던 가후쿠와 방송국 작가로 일하는 오토. 이 둘 사이에는 아기가 있었지만 네살이 되던 해(원작은 태어난지 사흘 만에) 심장에 이상이 생겨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아기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토는 같이 작업을 했던 연하의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갖기 시작하는데요. 원작에서는 아기가 죽은 이후 오토가 어떤 성적 욕망을 강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묘사합니다. 오토는 섹스를 할 때 마다 자신이 구상하는 이야기를 가후쿠를 비롯한 상대 남자들에게 조금씩 들려주며 전개시키곤 합니다.
여기서 영화는 원작 <드라이브 마이카> 뿐만이 아니라 연작집 <<여자없는 남자들>>에 실렸던 <세예레자드> 속의 한 여고생이 흠모하는 남학생의 집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쳐오는 이야기도 가지고 옵니다. 오토는 이 이야기를 가후쿠에게 하지만 정작 이야기의 결말은 가후쿠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고생이 남학생의 집으로 들어온 강도를 죽이고, 그 이후 주변이 너무 조용하자 자신이 범인이라고 CCTV를 향해 얘기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데요. 가후쿠도 몰랐던 이 이야기의 결말은 오토의 외도 상대인 후배 영화 배우 다카츠키에게 듣게 됩니다. 참고로 원작 <세예레자드>에서는 여학생이 강도를 죽이는 결말은 나오지 않는답니다.
가후쿠는 러시아의 한 연극제에 초빙되어 나리타 공항으로 향하던 가후쿠는 갑자기 연기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만 오토와 다카츠키가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후 모른척 지내던 어느 출근하던날 아침, 오토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퇴근 후에 보자고 얘기하고, 가후쿠는 왠지 불륜에 대해 토로하거나 혹은 이혼하자는 얘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정 시간 보다 늦게 귀가하게 되고, 지주막하출혈로 쓰려져 죽어 있는 오토를 발견하게 되죠.
소중한 아이를 떠나 보낸 슬픔과 상처를 안고 있는 가후쿠와 오토는 어찌보면 태생적인 상처를 가진 인물들입니다.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두 사람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어 상대에게 슬픔을 가중시키게 된다라는게 1막의 스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토는 본인이 구상하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불륜을 저지르며 가후쿠에게 큰 아픔을 주고, 가후쿠는 그런 오토의 상황을 알면서도 자신이 더 큰 상처를 받고 싶지 않는 방어적인 마음에 그만 오토를 떠나 보냅니다. 아내의 외도를 인정하게 되면 받게 될 본인의 또 다른 상처를 가리기 위해 현실을 회피한 가후쿠는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된 것이죠.
2막: 가후쿠 그리고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무대의 시작 (히로시마)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가후쿠는 연극 연출 제안을 받고 히로미사로 향합니다. 주지하다시피 히로시마는 인근 도시 나가사키와 함께 아픔을 간직한 곳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인을 포함한 수 많은 민간인들이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미국의 핵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곳이자, 전쟁 당시 일본군의 무기 공급을 책임졌던 군수 산업 도시기도 했죠. 영화의 주요 로케이션 장소가 히로시마라는 얘기를 듣고는 단순히 영화 촬영 협조가 잘 되어 정해진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어떻게 보면 대담하게 히로시마라는 도시가 가진 역사적인 의미를 그대로 차용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원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원했던 로케이션 장소는 한국의 부산이었다는 점입니다. 부산시에 촬영 허가까지 신청했지만, 코로나 펜데믹 상황으로 포기하고 일본 로케이션으로 전환했다고 하는데요, 부산 다음으로 선택 한 곳이 히로시마라는 것은 한국 로케이션이 주는 메세지 만큼의 강한 메세지를 원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부산 로케이션이었다면, 아마도 가후쿠는 히로시마 문화재단이 아니라 부산 문화재단의 초청을 받았을 것이고 우리는 부산에서 올려지는 <바냐 아저씨>를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를 연극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출을 맡는 시퀀스가 가장 큰 비중으로 다뤄지는데요. 이는 원작에는 없었던 것으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이야기 확장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연극은 여러 언어로 진행됩니다. 타갈로그어(필리핀), 일본어, 러시아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수화인데요. 일본이 과거 대동아공영이라는 선전 구호를 외치며 침략한 국가들의 언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이 히로시마가 아니라 부산이었다면 어떻게 다가오게 될까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보다 더 강하게 다가 왔을 겁니다.
<바냐 아저씨>의 오디션에 합격한 각국의 배우들은 처음엔 서로 다른 언어-심지어 수화까지 포함되어 있는-에 연습하는 과정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가후쿠는 그럼에도 서로가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가 아니라, 다른 것 예를들면 좀 더 내면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듯이 계속해서 대본을 그대로 읽기만 하라는 식으로 차분히 리드해 나갑니다. 결국엔 연극 배우들은 서로의 표정과 몸짓, 호흡 들로 이해의 깊이를 가져 가기 시작하게 되죠.
연극 <바냐 아저씨>의 바냐 역에는 오토가 외도한 상대인 다카츠키가 맡게 되는데요. 가후쿠는 오디션에 참석해 파트너였던 재니스 창과의 연기에서 그가 보여준 당돌함과 무례함 그리고 연습에 몰두 하지 못하고 연기 파트너와 연애 행각을 하며 지각하는 그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계속해서 그에게 기회를 줍니다. 이는 본인이 영위하고 있던 평범한 일상을 깨뜨린 다카츠키에게, 도시에서 되돌아 온 누이 동생의 매제가 파괴하려하는 고통스런 상황을 겪는 바냐의 역할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겪게 하면서 일종의 반성을 하길 원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오디션이 끝나고 배역을 정할 때, 다소 나이대가 맞지 않는 다카츠키에게 바냐역을 배정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카츠키가 거부 했음에도 말이죠.
<바냐 아저씨>의 연습이 계속되어 가는 와중에 영화는 하나의 사건을 맞으며 크게 출렁이게 됩니다. 그 주인공은 영화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주고 있었던 타카츠키 인데요. 죽은 오토의 추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가후쿠와 다카츠키는 연극 연습을 하고 퇴근 후에 바에서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사람이 그들을 알아보고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을 하죠. 이에 화가 난 다카츠키는 그만 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방치했다가 결국 사망하기까지 합니다.
어찌보면 히로시마라는 장소에서 펼쳐지는 과거 일본에게 피해를 입은 나라의 배우들이 하는 연기를 통해, 그들의 상처 회복과 앞으로 나아가는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기본적으로 던지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얌전하게 이렇게는 영화를 끝낼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은 그 원인 제공을 했던 자국 일본에게 직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이는 폭력을 행사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가후쿠의 차 안에서 다카츠키가 던지는 기나긴 독백과 그 직후의 장면에 답이 있습니다.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이라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에 똑같이 들어가 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애초에 그런 것은 불가능 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만 하면 노력한 만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정직하게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긴 대사를 하고 호텔에 내린 다카츠키를 뒤로 하고, 영화의 카메라 앵글은 깊은 밤의 히로시마 원폭돔을 비춥니다. 이 장면에서 소름이 조금 돋았습니다. 영화에서의 모든 주인공들이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극복하려는 모습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요? 히로시마의 아픔을 그들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죠. 전쟁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하죠. 심지어 그렇게 후대에게 교육을 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구원을 받는 다는 메세지를 자국 일본에게도 그대로 던지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카츠키는 스스로 저지른 살인이라는 죄를 순순히 응하며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남자 다카츠키의 시퀀스를 통해 감독은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 가후쿠에게 깨달음을 주는 동시에 과거를 그대로 보지 못하고 미화하고 수정하여 후대에 전하기에 급급한 일본에게 묵직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연극 연습 중에 경찰이 들이닥쳐 다카츠키를 연행하려 하자, 그는 '잠시 옷만 갈아 입고 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며 체포에 응하게 됩니다. 출연자들이 비로소 서로의 연기와 감정에 조화를 이뤄 궤도에 오르려고 하는 시점에서의 갑작스런 일인지라 최대한 연극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막: 자신의 본 모습 앞에선 가후쿠와 그의 메시야 미사키 (홋카이도)
다카츠키가 그렇게 무대에서 물러난 후, 영화는 이제 남은 주인공들의 상처 회복과 앞 날에의 희망을 모색하기 위해 부지런히 전개됩니다. 가후쿠는 심적으로 가까워지고 의지하게 된 미사키의 고향에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이 둘은 서로의 아픈 과거를 그대로 고백하며 앞으로 나아가며 남은 삶을 살기 위해 지난 과거 앞에 당당하게 서게 되죠. 미사키는 눈사태로 집이 무너졌는데, 그 속에 갇힌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 사실을 알았지만, 당장의 평온을 위해 모른척하고 일상을 보내다 아내를 떠나 보내게 된 사실을 고백합니다.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영매의 역할을 하는 여주인공이 자주 등장합니다. 주인공에게 (보통은 남자) 어떤 깨달음을 주거나, 현실에서 비현실로 인도하는 등의 역할을 하게 되죠. 원작 <드라이브 마이카>는 물론 영화 에서도 미사키는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단순히 조력자의 역할을 넘어서 가후쿠를 구원하는 메시야로서의 역할까지 하는 보다 확장된 캐릭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사키는 단순히 가후쿠의 드라이버를 뛰어 넘어 연극 연습에도 참여하고 가후쿠를 홋카이도로 이끌어 그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런면에서 <바냐 아저씨> 연극에서의 소냐 (수화를 하는 한국 여배우)와 미사키는 동일시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입니다.
원작과 영화 모두, 가후쿠와 오토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죽은 아기가 지금 성인이 되었으면 미사키 또래 일 것이라는 대사가 나오죠. 원작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미사키의 아버지가 가후쿠와 동갑이라는 대사까지 나온답니다. 하루키의 원작을 많이 읽어 보셨다면, 미사키는 곧 가후쿠의 죽은 아기가 환생 또는 시공간을 이동하여 영매로서 그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까지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4막: 용서, 반성, 앞으로의 나아감 (부산)
영화는 그렇게 홋카이도에서 서로의 과거를 고백하고 상처를 극복하는 노력을 시작하려는 가후쿠와 미사키 그리고 연극 단원들의 앞날을 보여줍니다. 가후쿠는 성공리에 연극 <바냐 아저씨>의 공연을 치르게 됩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인, 소냐가 가후쿠를 뒤에서 포옹하며 그럼에도 살아가자라는 대사를 손짓과 함께 하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마무리 되게 됩니다. 이렇게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한 번, 그리고 또 다른 분신인 소냐에게 한 번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미사키의 마지막 장면은 놀랍게도 한국의 부산입니다. 미사키가 부산의 한 마트 (메가마트가 노출되어 부산임을 짐작케 합니다.)에서 장을 보고 가후쿠의 사브900을 몰고 윤수 부부가 키웠던 것으로 보여지는 개와 함께 해변 도로를 드라이브하며 영화가 끝나게 됩니다. 감독은 원래 부산을 로케이션으로 하려고 했지만 무산 된 것이 아쉬워서 부산 장면을 넣었다고 한 것 같지만, 이렇게 로케이션 장소가 바뀌게 되면서 더 부각되어지는 요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히로시마를 주 배경으로 하면서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의 메세지의 임팩트를 가져갈 수 있었던 것과 부산을 마지막 장면으로 사용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에만 갇혀서 널리 주변국들을 살펴 보지 못하는 현 자국의 상황에 대한 메세지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며: 원작가와 연출가의 스토리의 조화를 통한 위대한 작품의 탄생
이창동 감독이 <헛간을 태우다>를 바탕으로 영화 <버닝>을 만들면서 한 얘기 중에, 하루키의 작품은 확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의미의 말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빌려서 영화로 무한 확장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는 얘기 일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도 원작의 이야기만 봤을 때는, 너무나 열려있는 결말이고 주인공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한 독자들의 유추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죠.
하루키는 이 부분에 대해서 항상 얘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인의 본업은 소설가 즉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풀어낼 뿐이고 어떤 메세지를 심는 다던가 의도를 갖고 이야기를 써내려가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만을 읽고 보면 너무나 다양하게 해석을 할 수 있기에 어떤 구체적인 메세지를 얻기가 여간 힘든게 아닙니다. 반면에 하루키는 작품이 아닌 문학상 수상 연설이나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 본인의 생각에 대해 조금은 적극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시점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영향으로 터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수상한 카탈로니아 문학상 수상 연설이 시발점이 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과거의 침략 전쟁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자국 정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대외적으로 발신해 오고 있죠. 즉 하루키는 소설은 소설로 두고 싶은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 하루키의 욕구 혹은 겉으로 말하지 못하는 조심성, 수줍음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영화의 다양한 대사와 상황, 장면들로 한 단계 승화 시켰다고 보여집니다.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든 두 일본의 소설가와 영화 감독이 함께 어우려저 지금의 일본 국민들과 주변국의 국민들에게 반성과 용서 그리고 화합이라는 큰 메세지를 던졌다고 보여집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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