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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인터뷰

하루키 1991년 프린스턴 대학교 객원 교수 시절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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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해 드릴 하루키 인터뷰는 1991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의 인터뷰입니다. 하루키는 유럽 체류 중인 1987년 출간한 <노르웨이의 숲>이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1990년 유럽 체류를 마치고 귀국했다가, 이듬해인 1991년 다시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로 초빙되어 약 4년간 다시 해외 생활을 한답니다. 이 시기에 <태엽감는새>가 출간되기도 했죠. 하루키는 프린스턴 대학교와 터프츠 대학에서 초빙 객원 교수로 '동아시아 연구'라는 학회에서 학생들과 1주일에 1~2개 클래스를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했습니다. 


하루키는 당시 프린스턴 대학의 동양학부 교수였던 호세아 히라타 교수의 적극적인 초빙 움직임으로 성사되었다고 보여지고요. 하루키의 미국 체류에 대한 에세이인 <이윽고 슬픈 외국어>의 초반에 어떻게 프린스턴 대학 객원 교수로 체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하루키가 설명하는데요. 하루키의 문학 영웅인 스콧 피츠제럴드의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을 가보고 싶다는 마음에 방문했다가,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글쓰기에 전념하고 싶다는 얘기를 첫 방문 때 알게된 지인에게 했고, 그 이후 일이 착착 진행되어, 1991년에 드디어 갈 수 있게되었다고 합니다. 


이 인터뷰는 그런 하루키가 1991년 프린스턴 대학교에 아내 요코여사와 함께 온 직후, 초빙에 도움을 준 호세아 히라타 교수와의 인터뷰입니다. 호세아 히라타 교수는 현재 터프츠 대학에서 계속 학생을 가르치고 있답니다. 인터뷰는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히라타 교수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하루키 프린스턴 대학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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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대학교 동아시아 연구학과 원문 링크


*이 인터뷰는 프린스턴 대학교(Martin Heijdra, Ph. D. 何義壯 Director, East Asian Library)와 호세아 히라타 교수(Professor of Japanese Literature Tufts University)의 번역 게재 허가를 받고 포스팅되었습니다.


호세아 히라타: 당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인가요?


하루키: 음, 전 저의 단편 소설들이 좋아요. 반면에 장편에 있어서는 좀 더 스스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죠. 히라타씨도 아시겠지만, 장편 소설을 탈고했다는 것은 마치 입고 있던 더러운 속옷을 막 벗어 던져 버린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입고 있을 때는 크게 신경쓰고 있지만, 벗어 던져 버린 후에는 얘기가 달라지죠. 그것을 다시 입기 싫을 것이기 때문이죠. 제가 단편 소설을 쓸 때는 제 자신과 텍스트 사이에 일정한 사이의 거리를 두고 작업을 합니다. 단편 소설을 쓸 때는 항상 이런 의식적인 계산이 필요합니다.  


호세아 히라타: 단편 <코끼리의 소멸>은 어떤가요? 


하루키: 네, 그 소설은 저도 좋아합니다. 전 코끼리라는 동물을 좋아한답니다. 코끼리는 매우 크죠. 그렇게 큰 동물이 아무 이유없이 갑자기 사라지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코끼리가 왜 사라졌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죠.  그 단편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맥주 캔을 밟는 일을 하는 코끼리에 관한 아주 짧은 글을 썼어요. 어느 작은 도시에서 모든 맥주캔을 재활용하는데, 도시에서는 모아진 캔을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코끼리를 고용하기로 결정했죠. 주인공은 '나'는 그 무거운 발로 깡통캔을 밟아버리는 코끼리를 보고 싶어하고, 일주일에 한 번 코끼리가 깡통 밟는 일을 하는날, '나'는 그것을 보러가죠. 이야기는 이게 전부에요. 아주 짧은 이야기죠. 이후에 <코끼리의 소멸> 단편 소설을 쓰게 되었고요. 이 단편은 어쨌든 코끼리가 사라지는 것 자체가 핵심이에요. 이야기의 다른 부분은 정말 중요하지 않아요. 코끼리가 사라지면 저는 완벽하게 만족할 거에요.  


호세아 히라타: 번역 작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나요?


하루키: 오, 그럼요 많이요.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역동성을 옮기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단어를 쫓기만 하면 안됩니다. 문장에서 핵심을 포착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제가 번역 작업을 하면서 사소한 실수가 발생하더라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텍스트 속에서 핵심을 포착했다라는 것을 알게되면 매우 기분이 좋답니다. 시를 번역하는 어려움도 필자의 핵심을 번역으로서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죠. 정말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


호세아 히라타: 특히, 번역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미국 작가가 있나요?


하루키: 그 작가가 더 좋아질 수록 번역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스콧 피츠제럴드의 경우 제가 그의 작품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위대한 개츠비>가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는지 기억하시나요? 오! 책을 가지고 계시네요? 저를 위해 읽어주시겠어요?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렇죠? 정말 번역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저는 물론 피츠제럴드의 팬으로서 이 문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잘 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은 정말 어려워요. 이 소설을 정말 번역하고 싶지만, 이런 문장들로 인해 저는 못할 것 같아요. (역주: 그리고 하루키는 이 인터뷰로 부터 15년이 지난, 2006년 드디어 그의 소원을 풀게 됩니다.)  


호세아 히라타: <위대한 개츠비>의 일본어 번역판이 없나요?


하루키: 아니오, 있습니다. 


호세아 히라타: 그 번역본은 좋아하지 않나요?


하루키: 음, 글세요. 그건 마치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옛 여자친구를 마주치는 것과 같은 것 같아요. 다른 작가의 번역본을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 같은 그런 것 같아요. 


호세아 히라타: 스콧 피츠제럴드의 어떤 점이 좋은가요?


하루키: 그는 이중성의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일종의 이중성을 가진 어떤 방식으로든 두 가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피츠제럴드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컴플렉스를 지님과 동시에 강한 우월감이 동시에 존재했죠. 아시다시피 그는 많은 부분에서 내적, 외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진실성과 야생성, 이상적인 모습과 방탕하는 모습, 온전히 젤다를 사랑하는 모습과 동시에 그녀를 온전히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가 알콜중독에 빠진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죠.


호세아 히라타: 많은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 '나'는 단순히 벌어지는 일들을 관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루키: 저는 개츠비를 관조하는 닉 캐러웨이를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죠. 아시다시피 그는 이야기의 나레이터에요. 저는 정말 닉 캐러웨이를 좋아한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죠. 전 제 자신이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는게 더 맞을 겁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1인칭 서사를 만들려고 할 겁니다. 그가 보는 세상은 롤러코스터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이 생생할 것이고요. 하지만 제 경우는 다릅니다. 저는 가만히 사물을 보고 싶어요. 그렇게 다른 사람들, 다른 움직임들을 관찰하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움직이지 않고, 그 움직임들을 바라만 봅니다. 무라카미 류 작가 같은 경우가 저와 반대되는 작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제가 보기에는 직접 행동하는 작가입니다.  


호세아 히라타: 이야기의 플롯에 대해 이야기 해주실래요?


하루키: 저는 소설을 쓰면서 미리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의 플롯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전 그런 계획 없이 일단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저도 몰라요. 제 이야기속 캐릭터와 함께 앞을 예견할 수 없는 모험을 겪고 있는 셈이죠. 실제로 매우 재밌답니다. 스토리 라인을 미리 알고 써내려가면 너무 지루할 겁니다. 작가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때, 필연적으로 서술의 모순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부분은 나중에 수정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저는 소설을 쓰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자연스러운, 자발적인 것으로 부터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야 할 때, 나무 조각을 계속해서 발밑에 받쳐가면서 지나야하는 느낌 혹은 닌자가 물위를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느낌과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스릴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호세아 히라타: 어떻게 새 이야기를 시작하시나요?


하루키: 글세요, 제 안에 무언가 넘치고 있다고 느껴야해요. 긴 장편 소설을 마친 후에는 다른 소설을 준비하는데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 안에서 무언가 넘쳐 흐르고 있음을 깨달을때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린다면 무언가가 완전히 제 안에서 침잠해 버릴 수도 있을겁니다. 그래서 흘러넘쳐 사라져 버리기 전에 소설을 시작할 순간을 포착해야해요. 꽤 신비스럽지만,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느낌인지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여자가 임신을 할 수있는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해요. 일단 제가 쓰기 시작하면 대처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저는 평소에 아내의 집안일을 돕는데 꽤 도움이 되는 남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소설 쓰기가 시작된다면 그 기간에는 소설을 쓰는 것 외에는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답니다.   


호세아 히라타: 소설 쓰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나요?


하루키: 3개월 정도요.


호세아 히라타: 생각보다 짧군요.


하루키: 그 보다 더 오래 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아마 제 아내가 저를 죽일거에요. (웃음)


호세아 히라타: 소설을 쓰기 시작한 후에, 무라카미씨와 세계와의 관계가 변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루키: 네, 더 친밀해졌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제 자신에게 있어서 자가 치료와도 같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제 소설 속에서 제가 추구하는 어떤 이상향을 그릴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이것은 마치 실험과 같다고 생각해요. 서로 반대되는 2개의 이미지 즉, 제가 추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서로 교차시킴으로서 저에게 더 필요한 바람직한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저는 이런 자가 치료는 모든 사람의 의미와도 같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사랑을 통해, 야망을 통해 또 돈을 통해서 자가 치료를 하곤 합니다. 저는 단지 글쓰기를 통해 자가 치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세아 히라타: 지금까지 소설을 써오시면서 글쓰는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바꾸어 보려고 시도하신 적이 있나요?


하루키: 네 몇 번의 비슷한 시도를 한 후에는, 스타일 바꾸려고 합니다.


호세아 히라타: 무라카미씨의 최근작은 초기작과 상당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의 > 사실적인 스타일로 쓰여졌다고 있을텐데요.


하루키, 리얼리즘으로 있어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노르웨이의 > 동화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포함해 젊은이들은 모두 '동화' 찾는다고 생각해요. 소설이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에서 탈출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면, 소설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느 콘서트에 갔는데, 콘서트가 4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고 합시다. 우리는 4개의 프로그램 중에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도 우리를 다른 세계로 있게 이끌어 주었다면 아주 만족하게 됩니다. 소설도 그와 아주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설도 많은 단점이 있을 있지만, 독자를 현실로 부터 멀리 인도할 하나의 통로만 있다면, 저는 일을 성공이라고 부를 있다고 생각해요.


호세아 히라타: 어떤 종류의 소설이 무라카미씨로 하여금 계속 반복해서 읽고 싶게 만드나요? 그런 좋아하는 작가와의 동일시를 추구하시나요?


하루키: 피츠제럴드가 그럴 수 있겠네요. 피츠제럴드는 분명히 저와는 다릅니다. 저는 한 작가와의 이상적인 관계는 제가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만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작업을 하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비한 것이죠. 저는 찰리 파커의 연주는 백번이고 들을 수 있어요. 근데, 음.. 그래요. 재키 맥린의 연주는 백번은 못들을 것 같아요. 물론 재키 맥린도 최고의 연주자 중 한명이지만 말이에요. 재키 맥린은 아마 50번 정도 들으면 지치게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찰리 파커의 연주는 피로함 없이 천번은 족히 들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재키 맥린 스타일은 정말 훌륭해요. 그런데 단지 찰리 파커는 그와 또 다른 훌륭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 두 연주자는 단지 서로 다를 뿐입니다. 바흐와 드보르작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전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단을 백번은 넘게 읽었답니다. 저는 누군가가 저를 화나게 만들면, 이 구절을 생각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호세아 히라타: 영화 제작이나 시 창작 등 다른 장르를 해보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하루키: 영화는 혼자 할 수 없는 협업이 필요한 작업이기에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 특히 산문시는 쓰고 싶답니다. 실제로 산문시를 써봤답니다. 매우 끔찍한 산문시였죠. 서신 형태를 띤 산문시죠. 꽤 긴 산문시였는데, 제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을 향한 산문시 였어요. 이 산문시를 본 모든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죠. 왜냐하면 저에게는 매우 좋았으니까요. 이 산문시를 탈고했을 때, 제가 싫어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끔찍한 산문시를 썼다는 사실에 꽤나 큰 즐거움을 느꼈답니다. 


호세아 히라타: 무라카미씨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매우 뛰어납니다. 독자들이 읽고는 당장 소설 속에서 묘사된 음식을 먹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죠.

 

하루키: 제가 음식 장면을 묘사할 때, 독자들은 항상 배고프기를 바래요. 섹스 장면을 묘사할 때는 독자들이 흥분하기를 바라죠. 저는 그것의 소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종 독자들로 부터 제 소설을 읽고 정말 자극을 받았다는 편지를 받는데요. 그럴때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한 독자는 제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새벽 4시까지 소설을 읽고는 섹스를 강하게 하고 싶은 자극을 받아, 새벽 4시에 남자친구의 아파트로 찾아가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 성공적으로 섹스를 할 수 있었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때도 꽤나 행복했죠. 제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독자가 보낸 편지에는 맥주 장면을 읽고는 바로 맥주를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달려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답니다. 이런 리얼한 독자들의 실제적인 반응을 듣고 싶답니다.


저는 소설이 독자들로 하여금 캔디 박스와 같이 일종의 특별한 선물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설을 쓰는 것과 관련해서 '예술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소설은 일상생활에서 보다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기능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제가 작가로서 작업한 일부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도 있답니다. 그녀가 내가 한 작업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전 그것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아내는 그녀를 위해 쓰여진 글을 읽고 행복한 기분이 들고, 정성을 들인 식사를 준비하는 등 저를 위해 모든 좋은 일을 합니다. 물론 이 행복감이 오랜 기간 계속 되지는 않습니다만. 특별한 음식은 한 1주 정도가 지나면 다시 평범한 예년의 식사로 돌아오게되죠. (웃음) 


호세아 히라타: 문학에 있어서 윤리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루키: 일본 문학에 있어서 비윤리는 종종 자기 형벌의 형태로 더 자주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나는 좀 더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지만 일종의 윤리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제어합니다. 자연스럽게 확장할 수 있는 윤리의 형태가 일본 문학에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윤리는 제약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고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저를 예로들면 저는 아내를 도와 많은 가사일을 합니다. 어떤 특정한 윤리 원칙에 의거하여 집안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성장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일을 합니다. 내가 먹을 음식을 요리하고, 내가 입은 셔츠를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것은 물론 매우 일상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것이 제가 관심있는 윤리의 개념입니다. 


호세아 히라타: 일본의 사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루키: 사소설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소설가들이 장르의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윤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외부로 흐를 윤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들의 윤리는 지나치게 내향적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소설의 대부분이 숨막힐 정도입니다. 저는 '도덕성'이라는 단어가 일본 문학에서는 '더러움'과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 말은 확립된 도덕성에 반하는 경우에만 나타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 문학에서 '예술가'는 확립된 도덕성에 반하는 반란군 정도로만 정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전 이 지점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생각합니다. 저는 세계를 바라봤던 그의 시선과 함께  확립된 도덕성의 반역자로서의 예술가의 정의의 사이에서 위선을 느낍니다.


호세아 히라타: 무라카미씨는 소설 작업 간에 미국 문화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는데요. 미국 문화는 당신에게 무엇인가요? 

 

하루키: 저는 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TV를 통해 보았던 미국의 이미지는 완전히 다른 세계와 동화와도 같은 것이었어요. 미국 소설을 읽으며 다른 세계로 탈출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외아들이라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보통의 어린 아이가 되었던 거죠. 화성을 방문하는 기분이랄까요. 그러나 이 새로운 세계를 일본어로 이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런데,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번역할 때, 사물과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에서는 일본이나 미국이나 차이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사실, 그의 작품을 읽고 나서는 미국에 대해 다소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나이가 든 이전 세대의 미국 작가들에게서는 불쌍한 캐릭터가 많이 등장했죠. 그러나 그들 작품 속의 캐릭터들에게는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았죠. 최근 작가들과는 다릅니다. 동시대의 비극적인 의미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 체류 생활을 끝내고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긴 역사의 과거가 있는 유럽과 비교할 때, 미국과 일본은 비슷한 것을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두나라는 짧은 기간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것에 집착해 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호세아 히라타: 가까운 시일에 새로운 장편을 집필할 계획이 있나요?

 

하루키: 네, 저는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 소설에 대한 계획이 없을 때, 내가 앞으로 다시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지 않을까라는 두려운 생각에 사로 잡힙니다. 그러다가 다시 무언가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 매우 훌륭한, 좋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죠. 마치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을 때의 느낌일까요. 지난 작업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저의 잠재력을 다시 시험해 볼 수 있죠. 실생활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다시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다르죠. 수 많은 것들을 다시 할 수 있어요. 실행활의 '나'는 소설 속에서 다른 세계로의 탐험을 떠나는 '나'와 구분되어 집니다. 그 분리 감각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어딘가의 감옥에 투옥되는 살인자에 관한 잭 런던의 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가학적인 교도소장에게 반역하고 그 결과로 끔찍한 대우를 받죠. 그러나 그가 받는 고문이 많을 수록 그의 상상력은 더 활발해집니다. 그는 다른 시대의 다른 나라로 배경을 옮길 수 있죠. 예를들어 18세기의 한국이나 이집트로 말이죠. 그의 상상은 점점 그가 처한 감옥의 자신의 모습보다 더 선명해집니다. 그의 세계는 감옥이 아니라 상상속이 진짜 세계이죠. 소설을 쓸 때도 이와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해요. 글을 쓰고 소설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은 실행활에서 보다 더 현실적으로 됩니다. 


호세아 히라타: 무라카미씨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하루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이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소설의 디테일함이에요. 그는 세계의 포괄적인 그림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디테일한 부분만을 쓰죠. 꽤 자주 제 마음 속에서 의미있는 것들과 의미 없는 것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예를들어 스탄 겟츠의 'A Girl from lpaneme'를 듣고 있으면 저의 고등학교 복도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 이유를 저는 모릅니다. 저는 한 번은 이런 연결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했습니다. 복도를 생각하면 그린 샐러드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글세요, 이건 왜 일까요. 대답은 다시 나는 이유를 모른다입니다. 어쨋든 저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집합들 속에 내 존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느낍니다. 소설의 임무는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가 본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인지 파헤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소설을 쓰는 것은 자신의 숨겨진 표식을 얼마나 잘 파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 낼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평가들은 항상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연결의 의미를 고치려고 합니다. 전 종종 그들의 해석이 핵심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끼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저 나름대로 저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것 역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꽤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창작물을 분석함으로서 생계를 꾸려야 합니다. 따라서 소설가의 창작물이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들은 해석을 내놓아야하죠. 결국 비평가들이 써내려가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또다른 허구적인 창작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제가 그들의 해석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저는 비평가들의 독서가 그들의 허구적 글쓰기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들의 독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저자로서 텍스트를 만듭니다. 텍스트는 누구에게나 부분적일 수 밖에 없죠. 저는 그것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없어요. 물론 비평가들이 실수했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렇게 말할 권리 또한 없다고 생각해요. 비평가들은 텍스트에 대한 다른 종류의 액세스 권한을 갖게 되는거죠. 소설가가 창조한 텍스트와 비평가의 또다른 허구적 창작물 어느 것을 읽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을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어쨋드 하나의 창작물에 대해 여러가지의 해석에 대한 접근은 분명히 독서의 올바른 방향일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의 새로운 번역본이 나와서 읽다가, 프린스턴 대학교 사이트를 들어가 보았습니다. 하루키의 인터뷰가 왠지 있을 것 같았거든요. 역시 직감은 맞았고, 이메일을 보내 번역 게재 허락을 맡고 포스팅했습니다. 마지막 하루키의 대답에서, 그가 1987년 작품 <노르웨이의 숲>의 큰 성공으로, 인터뷰 당시 일본 내 비평가들로 부터 얼마나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잘 느껴져 뭔가 측은함이 느껴졌습니다. 이상 1991년의 무라카미 하루키였습니다. 


끝으로, 번역 게재를 허락해주신 프린스턴 대학과 인터뷰어이신 호세아 히라타 교수님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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