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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해 드릴 인터뷰는 하루키가 작년에 발표한 단편이 이번 2월 10일 뉴요커지에 실리면서 가진 인터뷰입니다. 하루키는 18년, 19년 여름 <문학계>를 통해 단편을 발표했습니다. 18년에는 <돌베개에>, <크림>, <찰피파커 찬양 보사노바>의 3편을, 작년 19년 여름에는 <with the beatles>,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집>을 발표했답니다. 18년에는 <크림>이 뉴요커지에 실리면서 함께 진행한 인터뷰를 제 포스팅으로도 소개해드렸는데요. 이번에는 <with the beatles>가 실리면서 역시 인터뷰를 진행했답니다. 하루키의 최근 단편이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기 전인데, 이렇게 뉴요커를 통해서라도 내용을 접할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with the beatles>의 영문 버전은 아래 뉴요커 링크에서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하루키 단편 <with the beatles> 영문 버전-뉴요커지

 

하루키 2020년 2월 단편 <with the beatles> 뉴요커지 인터뷰

원문: https://www.newyorker.com/books/this-week-in-fiction/haruki-murakami-02-17-20

'기억이 이야기를 유발시키는 방법에 관해'

 

Q: 이번 뉴요커에 실린 당신의 단편 <with the beatles>에는 주인공의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2명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명은 딱 한 번 지나친 여자이고, 다른 한 명은 진지하게 사귀었던 여자이죠. 한 번 본 여자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몸짓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녀는 가슴에 비틀즈의 LP를 가장 소중한 것처럼 들고 서 있었습니다. 반면 사귀었던 여학생도 매력적으로는 생각하지만, 몇 년 동안 사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코 그에게 있어 진정 소중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 딱 한 번 본 여자가 그토록 기억에 남았을까요. 몇 년간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왜 그렇지 못한 걸까요.

주인공에게 고등학교 복도에서 처음 본 LP를 든 소녀는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갈망 혹은 동경의 상징으로 볼 수 있어요.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는 종류의 것이 아니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고,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일도 없을 거에요. 그녀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나의 잃어버린 도시>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상징과 매우 비슷합니다. 사실 이야기 속의 이 장면은 제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기억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때, 학교의 복도를 지나가다가 어떤 여학생을 지나쳤는데요, 그녀는 비틀즈의 <with the beatles> 앨범을 마치 소중한 것인 것 처럼 가슴에 꼭 안고 있었답니다. 그 장면은 제 마음 속에 새겨졌고 학창시절의 어떤 상징이 되었답니다. 때로는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의 실제 생활은 상징과는 다르고, 그 둘사이의 간극을 채울 수 있는 것도 사실상 거의 없습니다. 이번 단편 소설은 물론 픽션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들도 저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Q: 이야기의 메인이 되는 스토리는 주인공이 오랜 기간 만났던 여자친구의 오빠와 함께 보내는 몇 시간입니다. 그는 주인공에게 자기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고 얘기하죠. 모차르트 교향곡의 2악장에서 3악장으로 점프해 버린 것 처럼, 그의 삶의 일부에서 사라져버린 시간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다른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을까요? 

주인공은 여자친구의 오빠가 말하는 것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판단을 못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에게 이상하게 끌리고 있고, 그것은 작가인 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저의 경우 소설을 쓸 때, 이상하리만큼 끌리는 캐릭터가 있어야 이야기가 원활하게 진행됩니다. 여자친구의 오빠는 이야기상 주인공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바꿔 버릴 수 있는 일종의 키를 쥐고 있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건 저만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Q: 주인공은 그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류노스케 아쿠타가와가 자살하기 직전에 쓴 이야기인 <톱니 바퀴>의 한 부분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결국 (스포일러 경고!) 자살한 사람은 여자친구의 오빠가 아닌, 주인공의 여자 친구 였습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셨을 때,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염두해 두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요코가 왜 자살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 심지어 저자인 저 조차도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은 잘 보지 못합니다. 예상치 못한 형태로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때는 이미 어떤 대응을 하기엔 늦은 상태 일 것입니다. 사요코의 오빠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런 류의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해서 지금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요코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죠. 혹은, 그가 위기를 극복했을 때, 그녀는 오히려 더 가라앉아 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몇 년의 시간 지난 후, 주인공은 두 남매에게 일어났던 일의 결과만 알게 됩니다. 누군가 사요코를 구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뭐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여기에 있는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Q: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 자신은 비틀즈의 열성적인 팬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비틀즈의 음악은 젊은 시절을 감싸던 배경 음악일 뿐, 그들의 음악이 그의 인생에서의 어떤 방향성을 같이 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죠. 이런 느낌은 당신의 캐릭터들과 공유한 것인가요?

저는 10대 때, 꽤나 고상한 척, 잘난 척을 했던 것 같아요. 음악은 재즈와 클래식 음악에 열중 했답니다. 비틀즈가 기본적으로 10대 시절을 감쌌던 월페이퍼 같은 음악이라는 점은 맞습니다. 당시 비틀즈의 음악은 라디오만 틀면 흘러 나왔지만, 저는 대부분 반 정도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비틀즈의 레코드는 사지 않았답니다. 제가 그리스 섬에 잠시 살았을 때인 90년대가 되어서야 해변을 거닐며 워크맨으로 <white album>을 처음 부터 끝까지 들었던 것이 처음 이었어요. 전 그 앨범을 듣고서 완전히 매료되어, 비틀즈의 음악을 다시 처음 부터 듣게 되었답니다. 

Q: 1년전 뉴요커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던 단편 <크림>에서는, 잘 알지 못한 소녀가 주인공에게 피아노 리사이틀에 초대합니다. 하지만, 그가 연주회 장소에 도착했지만 리사이틀은 커녕 소녀도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번 단편에서도 주인공의 예전 여자친구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지만, 그녀는 사라져 버린 상태이죠. 소설가로서 이런 플롯이 당신에게 어떤 점을 어필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소설을 쓸 때 '상실' 이라는 소재에 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린 무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들어,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다가 우물에 빠지게 됩니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 상황에 매료된답니다.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 없고, 거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때 바로 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루키는 17년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 발표 이후, 18년 부터 계속해서 단편 3개씩을 발표하고 있는데요. 모두 작가 본인의 과거로 돌아가 당시의 기억을 소재로 이야기를 쓰고 있답니다. 작년에 발표한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이고요. 일본내 독자들은 이런 그의 이야기들을 접하고, 어느덧 70세가 넘은 하루키 본인이 신체적인 나이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제가 이전 포스팅에서 '바톤 터치' 의식으로 명명한 부분 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과는 반대 상황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루키는 도쿄 FM의 DJ를 여전히 왕성하게 진행하고 있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라디오 방송을 2주 연속하기도 했고요. 보통은 2달에 한 번 했는데 말이죠. 무라카미 라디오 11회, 12회 내용은 바로 다음 포스팅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D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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