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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문고본 출간 및 하루키 작가 인생 40주년 기념 교도 통신 인터뷰 2편 이어갑니다. <기사단장 죽이기>에 담긴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친절한 하루키상은 작품에 담긴 작가 본인이 생각하는 의미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원문 클릭*

 

https://www.diariolasamericas.com/cultura/la-muerte-del-comendador-haruki-murakami-llegara-octubre-n4156753

 

Q: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주인공 '나'의 칼은 기사단장의 얇은 몸을 관통합니다. 그의 하얀 옷과 '나'의 손은 피로 물들게 됩니다.  

손에 칼을 쥔 느낌이나 그 칼을 들고 다른 사람을 찌르거나 그로 하여금 피가 사방에 튄다거나하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느낌을 독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시뮬레이션 상황으로서만 가능하지만요. 때때로 어떤 것들은 물리적인 묘사를 통해서만 독자로 하여금 원하는 곳으로 옮겨가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주인공 '나'는 유화를 그리는 화가인데요.

저도 유화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때문에, 소설을 쓰기 위해서 오직 유화 관련 책들을 좀 읽었을 뿐이었죠. 소설을 쓰고 몇몇 유화 화가분들에게 검토 같은 것을 부탁했는데, 크게 이질감이 없다고 하면서, 회화나 이야기 모두 제로에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동일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말에 동감했습니다.

Q: 주인공은 유명한 일본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씨의 집에 살게 됩니다. 비엔나에서 유학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의해 합병되었고, 같은 시기의 아마다씨의 동생은 중일 전쟁에서 난징 침략과 대학살을 자행한 부대에 복무하죠. 이 두가지 역사적 사건이 소설에 녹아 있습니다. 

소설은 주인공이 살게된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서 기사단장이 나타나면서 급속도로 전개됩니다. 이 소설은 '과거'를 다시 찾아 내어, 현재로 끌어 내는 소설입니다. 

Q: 앞에서 무라카미씨는 '기사단장'이 '역사적인 연결고리' 혹은 '과거의 메신저'일 수 있다고 얘기하셨죠. 

그런데 무언가를 아주 깊은 곳에 구멍을 파고 숨겨 두었다면, 그것을 다시 꺼내는데에는 항상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다시 열려 우리 앞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역사란, 우리가 책임져야 할 '집단(공동의) 기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Q: 무라카미씨는 1949년 전쟁 후에 태어나셨죠. 

사람들이 여전히 국가 논리에 이끌려 서로를 죽이는 생생한 기억을 간직한 시기였다고 생각해요. 저는 심지어 지금도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매우 심각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그들이 견고한 대지 위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만 같아요. 그것은 단지 연약한 진흙일 수도 있습니다. 

Q: 전쟁 시기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폭력성이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이 세계의 기이한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은 모두 우리 마음 속 아주 깊은 어두운 곳으로 부터 나온 다고 믿고 있답니다. 이 부분이 저의 작품을 통해 조심스럽게 계속해서 다루어져 왔고요. 이런 작업들이 이제는 서서히 인터넷이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도 오픈 되어 현실 세계로 흘러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평소 일상 생활 속에서는 우리 마음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폭력의 징조'를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과거의 그릇된 생각이 다시 부활하는 있다는 걸 느끼게 되며 두려운 생각에 휩싸이곤 합니다.  

Q: 이런 사회에서 작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할까요?

우리 소설가들은 기본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야기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윤리의 원칙은 그 자유 안에 존재해야만 하죠. 기본적인 기준이 될 개념을 제공하는 것은 소설가의 책임입니다. 반면 악에 대한 묘사는 섬뜩하고 잔인합니다.

Q: 1997년에 발표된 <언더그라운드>는 그 2년전 옴진리교 신도들에 의해 자행된 도쿄 지하철 사린 테러의 희생자들을 인터뷰한 논픽션인데요. 

<언더그라운드>를 준비하면서,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능가하는 혹은 부셔버릴 수 있는, 소설가로서 저만의 이야기를 창조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옴진리교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옴진리교와 같은 종교가 아닌 소셜 미디어야 말로 분산된 아이디어나 개념을 직접적이고 강하게 확산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소셜 미디어 자체가 나쁘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유형의 힘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Q: <기사단장 죽이기>도 그런 힘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 일까요?

소셜 미디어상의 폭력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흩어져있는 조각 처럼 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야기가 길면 길 수록 더 좋아진다고 믿는 답니다. 적어도 조각화 되지는 않았으니까요. 전체적으로 일관된 가치의 축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시험 속에서 세워져야 하고요. 그것은 이야기의 힘입니다. 오직 소설만이 사람들의 실제 경험을 통해 다루는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경험하는지 여부에 따라 그들의 생각과 세상을 바라 보는 방법이 바뀌어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의 가슴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저는 소설이 갖는 힘에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답니다. 

Q: <기사단장 죽이기>에는 와타루 멘시키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신비한 재력가가 등장합니다. 멘시키의 말뜻은 '색이 없다'인데요. 많은 독자들이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떠올렸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깨닫지는 못하고 썼답니다. 멘시키는 피츠제럴드의 작품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의 오마쥬입니다.

Q: 개츠비는 그가 사랑하는 데이지의 집이 보이는 곳에서 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멘시키는 아마도 그의 딸이라고 생각되는 마리에가 살고 있는 집을 볼 수 있는 오다와라 외곽의 산에 있는 저택에 살고 있습니다.

개츠비는 데이지에 대한 사랑을 목표로 하여, 가난한 삶에서 현란한 삶을 누리는 부자가 되었죠. 그와 반대로 멘시키는 부자인 생활을 비교적 평범하고 평온하게 유지해 갑니다. 그들의 성격과 인물은 다릅니다. 개츠비의 설정만 빌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Q: 멘시키는 주인공 '나'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합니다. 그는 초상화를 그리는 행위를 '교환'이라고 얘기하는데요. 서로 교환하는 것 말이죠. '나'는 죽은 여동생 코미치와 교환 의식을 하고, 마리에는 그런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교환'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제한된 수의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무언가 영향을 주지 않으면 이야기가 달라 붙지 않아요. 멘시키가 그의 소유지에 굴착을 시도해 구멍을 내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을 거에요.

Q: 그렇습니다. 멘시키는 인부들 까지 불러서 방울소리가 들려오는 지점에 구덩이를 파게 되죠.

그런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이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과거의 제 소설 속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그다지 많은 소통이 있지 않았어요. 보통 두 주인공 사이의 관계가 계속 축적되어 나갔었죠. 캐틱터는 꽤 고립되어 있었고, 대다수는 이름 조차 가지지 못했죠. 그런데 점차 소설을 써 나가면서 점차적으로 캐릭터 간의 여러 상호 작용에 대해서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여러 사람이 상호 작용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Q: <기사단장 죽이기>도 역시 제한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들 사이에 멀티플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제공하고 영향을 주는 것은 차분히 나아가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노르웨이의 숲> 이전의 작품들은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그 이후의 소설들은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을 창조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Q: <기사단장 죽이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오랫동안 무라카미씨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1인칭 서사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점인데요.

저는 1인칭 서사 형식의 소설로 데뷔하고 초기 작품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3인칭 내러티브로 옮겨 갔죠.

Q: 무라카미씨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초기작들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1995년 한신 대지진을 모티브로 쓰여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을 춘다> 연작집에서는 3인칭 시점으로 쓰여졌습니다. 

<1Q84>는 3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매우 긴 소설인데요. 그렇게 3인칭 시점으로 긴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처음 시작인 1인칭 시점으로 긴 소설을 쓴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하고요.

Q: 3인칭 시점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1인칭 시점에서는 가능한 것이 있나요?

주인공의 독백 장면을 쉽게 쓸 수 있다는 점이 있을 수 있겠네요. 또한 명료하고 다른 부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쓸 수 있고, 독자들은 '나'라는 주인공을 쉽게 식별할 수 있고요. 독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작가로선 행복합니다. 

Q: 그렇죠.

<위대한 개츠비>도 1인칭 시점의 소설이기도 합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롱 굿바이>나 제가 좋아하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도 마찬가지죠. 이 작품들은 제가 모두 번역을 했는데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Q: <기사단장 죽이기>의 시작 부분에 주인공과 그의 아내는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봉인했으나 "결혼 생활을 한 번 더 끝냈다."라고 합니다. 

이야기의 주요 포인트는, 주인공이 어둠 속의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와 '타이나이 메구리(태내 순례)'와 같은 일본의 종교적 체험 처럼 다시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랍니다. 처음 시작 부분에서 독자들과 저 스스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Q: 음, 그렇군요. 그렇다면 소설의 도입부에서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최초의 소설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네, 지금까지의 소설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영원히 그 상태로 둔채 이야기를 마무리 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경우 처음 부터 이 소설은 '복원' 혹은 '회복'에 관한 것이라고 결정을 했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그 내용을 넣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Q: 그리고 소설의 끝에서 주인공 '나'는 멘시키 같이 되지는 않을 것이고, 그것은 내가 믿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멘시키는 마리에가 자신의 딸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Q: 아마 뭐가 사실인지 알고 싶지 않아 할 수도 있겠죠.

외부 세계와의 유대를 형성하든 그렇지 않든, 그는 정확하게 결정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일을 불러일으키는지 자각하지 못하죠. 그는 모든 것을 파악한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해요. 그는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고 냉담한 상황을 견지하지만, 림보 속에서 방황할 뿐입니다.

Q: 주인공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와 멘시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나'는 그의 전 아내를 사랑한다는 점이에요.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은 그녀가 떠난 후에도 변하지 않죠. 그녀가 돌아온다면 그는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고, 결국에는 그렇게 됩니다. 

Q: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되게 만든 것일까요?

그것은 물론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신뢰도 중요합니다. 아마도 그 부분이 멘시키에게 결여된 것일테죠.

Q: '나'가 기사단장을 죽인 후, 마음 속 가장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무라카미씨가 지금까지 묘사해온 어둡고 깊은 곳들 중 가장 어두웠던 것 같습니다. 

저는 심오하고 깊은 암흑을 겪지 않고는 회복도 없다고 믿는 답니다. 다시 돌아 온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아주 어두운 곳을 지나 다른 편으로 나간 후에야 처음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Q: 저는 독자로서 주인공의 외로움을 강하게 느꼈답니다. 그는 어두움을 헤쳐나가며 육체적인 격렬함까지 수반해야 했죠. 

용서의 감각은 '선함'과 '악함' 혹은 '밝음'과 '어두움'과 같은 구별을 뛰어 넘습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기사단장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필요가 있었죠. 오직 그렇게 해야만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Q: 무라카미씨의 작품들은 <기사단장 죽이기> 처럼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이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계 여러 독자들을 끌여들이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해외에 나가서 놀라는 점은 먼저, 10대 부터 20대 까지 많은 젊은 독자들이 있다는 점이었어요. 일본의 독자층과 비교했을 때, 분명하게 알 수 있답니다. 저는 이 젊은이 들을 포함한 해외의 독자들은 누구나 각자 어떤 종류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글은 소위 말하는 문학적인 방식이라기 보다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달리 말하자면, 그렇게 쓰여진 작품은 좋은 도구로서 쉽고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특성은 아마 해외에 번역되어 질 때도 그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떤 종류의 방식을 체득화하게되면, 주변의 환경이나 감정들에 맞게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게 되죠. 최근에 저의 외국 독자들도 이런 제 작품 스타일 혹은 보편적인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것은 제 직관에 의존한 제 주관적 의견이긴 합니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며, 하루키가 정말 친절해졌다라고 느꼈었는데, 그 이유를 소상히 알게 된 소중한 인터뷰였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처음 부터 결말을 정하고 썼다라는 점, 주인공들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에 중점을 두고 썼다는 점 등 확실히 하루키 작가 인생의 마지막 여정 속에서 확실한 변곡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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