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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2003년 처음 번역한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2014년 다시 번역 출간한 기념으로 일본의 저명한 영미번역가 시바타 모토유키씨와 가진 인터뷰 1편에 이어 2편 이어갑니다.  *하루키 <호밀밭의 파수꾼> 新번역 출간 인터뷰(1)편 보기


Photo: Rex Features


"꽤나 이상한 소설이에요. 잊을 수가 없었어요."

하루키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新번역 출간 인터뷰(2)

출처: 하쿠스이사 홈페이지


시바타: 등장인물 DB의 경우엔 작가 스스로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썼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하루키: 그럴지도요. 피비라는 존재는 지나치게 순수한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어요. 독자들은 실제 세상에도 그런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순수함을 기대하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유령과도 같다랄까요. 실제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반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번 번역을 통해 그런 근원적인 두려움을 다시금 강하게 느끼기도 했어요. 


시바타: 예를 들어 스트라드 라이터 같은 인물을 부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고요. 


하루키: 맞아요. 사춘기 시절에서 경험할 법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관점에서 무서운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성장하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잖아요. 결국 자기자신의 동경과 함께 콤플렉스를 투영한 혼합물 속에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성장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겠죠. 전 그런 관점에서 <캐쳐 인 더 라이>의 숨겨진 주머니를 느낄 수 있었어요. 순수한 자기 투영 같은 관념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대로된 실재하는 인간 군상이 드러나있고, 독자는 그 대상을 객체화하여 그 속에 자신을 대입하게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어요. 그 덕분에 등장인물 모두가 다채롭게 실제로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서 스토리의 힘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주인공 홀든은 뉴욕으로 나온 후, 일종의 고난의 연속인 지옥 순례와도 같은 여정을 시작하죠. 그런데 그 지옥이라는 것이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 그 자체이기도 하고, 그대로 홀든 자신 내면의 암흑이기도 하죠. 그런 상호 투영 같은 것이 소설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작품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하고 말이죠. 그런 작가의 의도를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느껴왔기 때문에 <캐쳐 인 더 라이>가 지금까지 오랜시간 읽히고 있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사실 소설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의미성과 또 다른 의미성이 어떻게 호응하는 것이라는 거죠. 음악에서 말하는 '배음(hamornic overtone)' 같은 거에요. 배음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의 귀에는 쉽게 분별되어 들리지 않겠지만, 음이 음악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전파되어 나가는지는 음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처럼요.


시바타: 아마도, 그 '배음'이라는 것을 이미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죠. 그것이 어떤 것인지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입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루키: 네. 온천에 들어가 있으면 몸이 따뜻해 지기 시작하잖아요. 음악에서 배음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신체에 이미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왜 남아 있는지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 하죠.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좋은 훌륭한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 속에 스며들고 거기에 단단하게 남게 되죠. 그런 좋은 이야기가 어떻게 좋지 않은 이야기와 기능적으로 구조적으로 다른가에 대해서는 역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어휘라든지 수사라든지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죠. 읽을 때는 술술 읽히는 책이 있는 반면, 왠지 모르게 우리 안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책도 있어요. <캐쳐 인 더 라이>는 누가 뭐라해도 실로 단단하게 무언가 남기는 이야기 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시바타:  <캐쳐 인 더 라이>의 좋은점을 얘기할라치면, 결국은 기성 체제에 대해 반항하는 소설이라는 식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죠. 


하루키: 맞아요. 그 부분만 잘라서 얘기해버리면 별로 의미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그 소설은 자아 성찰의 이야기야.'라고 또한 잘라 말해버리는 것 또한 의미가 없어요.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입구가 있고, 경로가 있고, 관점이 있는 그 다양함으로 소설의 존재가 깊어진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읽은 책이 마음 속에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남아 버리게 되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해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여간 힘든게 아니죠. 그래서 어떻게든 그런 가려운 부분을 의미를 찾을 수 있게끔 말로 끄집어 내어 표현을 해버리는 순간 일종의 제도화가 이뤄지는 거죠. 그렇게 된 이후엔 저도 어떻게 해야할지 곤란해집니다. 


시바타: 어떤 종류의 장르의 어느 정도 읽혀지고 있는 책이라면 글세요. 어떤 측면에서의 제도화는 불가피한 면이 있겠지만, 한 마디로 그 책을 꽤나 잘 표현했다고해서 그 설명을 절대시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씨의 새로운 번역본 중에 이 부분은 참 좋다라고 할 만 한 구절이 있을까요? 


하루키: 음 글세요. 특별히 없네요. 단지, (두번째 번역이기도 하고) 꽤 능숙하게 술술 번역해 나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중간 즈음인가 내가 이렇게나 능숙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웃음) 저도 소설가이긴 하지만 보통은 절대 이런 작품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시바타: 그 능숙함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어떤 식으로 드러나던가요? 


하루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면서, 저도 모르게 12사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과 같은 식이었어요. 그렇게 이야기는 곧잘 전환해가면서 변화를 주고 있죠.


시바타: 이번 새 번역본을 읽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훨씬 능숙해졌다라는 느낌으로 말이죠. 


하루키: 또 하나 작가 샐린저는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전쟁을 체험하고 그 이후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죠. 그는 독일군을 상대로 치열하고 잔인한 전투를 겪고 나서 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되죠. 그 이후 그는 초기 단편 때와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는 전쟁 말기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이 있을 때 가장 치열한 전장을 겪었는데요. 그것에 대해 직접적인 묘사는 일절 하지 않았죠. 같은 시기에 등장한 노먼 메일러나 어윈 쇼 같은 경우엔 모두 자신이 경험한 전투의 생생함을 그림으로써 많은 독자들을 만들 수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당시에는 '새로운 세대의 작가'라고 인식되었었죠. 하지만 샐린저는 이런 전투가 있었다 정도까지만 쓰죠. 전투 자체에 대해서는 단호할 정도로 묘사하지 않았어요. 아마 너무 강렬한 경험이었기에 쓸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캐쳐 인 더 라이>는 샐린저 자신의 외상장애와 그것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로 작품을 통해 자조적인 시도를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기법을 통해 그 작업을 매우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라고 말이죠라고 말하고 있지만, 저 역시 작품의 의미를 부여하는 제도화 작업을 하게되는군요. (웃음) 뭐 어쨌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바타:  그러면 소설의 결말을 보면 홀든이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언젠가 다시 사회로 나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결말의 방법도 샐린저 자신도 스스로 다시 사회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하루키: 사실은 그다지 잘 돌아가지 못했네요. 샐린저 자신은..


시바타: 이후 홀든이 사회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끝나는 소설에서는 얘기하지만, 랄프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사람>도 그렇습니다만, 결국 엘리슨도 그 다음을 쓸 수 없는게 아닐까요. 막상 사회로 복귀하려고 하면 어떻게 복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일종의 하나의 패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이게 조금전에 무라카미씨가 얘기한, "너"라는 존재가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왠지 모르게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하루키: 홀든이 소설이 끝나고 그 이후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야기의 결말은 어느쪽으로 기우는지에 대해 명확히 얘기하고 있지 않다고 전 생각해요. 그것은 소설을 쓸 당시의 샐린저 자신의 상태이기도 하지 않았을까요. 여하튼 앞으로 어딘가로 다시 복귀한다고 하는 밝은 희망적인 결말이라고는 단정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원점으로 돌아 온 것 같은 느낌도 전 받았습니다.


시바타: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여하튼 앞으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게 만들며 끝내는 건 맞다고 보입니다. 그런 의미로 <허클베리핀>과도 통한다고 볼 수 있을거 같아요. 


하루키: 주인공 홀든의 형인 D.B.가 요양 중인 병원에 찾아오죠. 그 D.B.가 바로 샐린저 작가의 의역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는 스스로를 찾아가고 있는거에요. 그런 점에서 뭔가 무서운 생각이 들었죠.


시바타: 어떤 점이 그런 생각이 들게 했을까요? 


하루키: 즉, 자신을 찾아가서 질문하는 거죠. 괜찮아? 라든가 무슨일이 있었던 거야?라든가 라는 질문이에요. 그런 종류의 분열된 인격의 상호 작용 같은 것에 소설을 읽고 번역하면서 소름이 돋았어요.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랄까요. 홀든이 그런 것들을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무섭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그 때 홀든이 요양원에 어떤 종류의 질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소설 속에서는 확실하게 제시되지 않잖아요.  


시바타: 정신과 의사가 바보라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죠. 


하루키: 홀든은 자신이 결핵에 걸려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지내려고 하는 장면이 있죠.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홀든이 정신적인 병으로 인해 요양원에 들어갔다고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다고 생각해요.


시바타: 네. 알기 어렵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정도랄까요. 그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라는 것 정도 밖에 쓰여 있지 않죠.


하루키: 전 처음에 병상에 누워있는 스펜서 선생님을 보고 그 이후에 홀든이 결핵에 걸린걸까라고 생각했던 거 같네요. (웃음)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요. 


시바타: 일단, 정신병원이라고 하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지만, 홀든은 숨이 빨리 끊어진다라던지 그런 묘사들로 인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홀든 콜필드라는 소년이 정상적인지 비정상적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는 역시 독자 누구나가 자기자신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여전히 남아있겠죠.


하루키: 전 병리적인 것은 잘 모릅니다만, 머리 속의 밸브가 잠기며 끊어질 것 같다는 분열적인 기질의 사람은 좀 처럼 없을 테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홀든을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하지만 샐린저 자신에게는 물론 보통의 모습일 겁니다. 샐린저 자신의 눈으로 보면 스스로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는 자연스럽고 보통의 존재가 아닐까요. 그리고 보통 독자들에게도 역시 홀든의 비이성적인 모습은 비교적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홀든의 행동은 매우 기이하고 따라가기 쉽지 않지만 그가 주장하는 '심성'은 매우 이상할 정도로 강한 설득력이 있잖아요. 결국 독자들은 '그래, 맞아.'라며 고개를 끄덕 거리게 되죠. 


그런 보통이면서도 심상치 않다라는 양면성이 소설의 하나의 KEY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 양면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이야기'라는 독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효한 '그릇'에 담겨 나오는 것. 바로 이 부분에 강하고 자연스러운 흡인력이 발휘된다고 봐요. 이야기는 일단 차에 이야기를 태우고 나서 제대로 타 있는지 어쩐지 잘 알지 못한채 술술 떠들어대며 일단 갈 수 있는 곳 까지 간다는 느낌이랄까요. 그 목적지는 이야기하면서 같이 생각하는거죠.


시바타: 즉, 전기적인 토대는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전기적이라고해서 설득력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하루키: 글세요. 그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해요. 보통 이런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작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분석을 해두었다가 쓰는 경우가 많아요. 자신의 인격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가정을 가지고 설정해두고 그것을 이야기 속에 던져서 전개시켜 나가죠. 그리고 그 인격을 발전, 성장 시켜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샐린저는 자신의 가정 같은 것은 제외하고 어쨌든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의 차 속에 던져버려서 점점 어디로 향할지 본인도 알 수 없는 특수한 기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해요.  발전성은 없다고 느껴집니다. '성장? 그런건 없다.'라는 느낌으로 말이죠. 그점이 <캐쳐 인 더 라이>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인 것 같아요.


시바타: 일반적인 청춘 소설의 형태와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측면이 이 소설에 있다는 얘기일텐데요. 그런 의미로 말하면 샐린저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캐쳐 인 더 라이>는 매우 특별하네요.


하루키: 네 특별하죠. 이 소설의 경우 저자 샐린저는 이야기의 틀이나 구조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쓰고 있다는 점이에요. 정해진 길로 가면 그러한 결론에 도달 할 수 밖에 없다고 느낀 건 아닐까요. 그래서 자연스러움에 조급함을 느낀 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움이 절박했다라는는건  이상한 말투지만요. (웃음)


시바타: 샐린저의 다른 작품도 번역하실 생각이세요? 


하루키: <나인 스토리>는 할 수 있다면 한 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실제로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프래니와 주이>도 번역하면서 간사이어 버전으로 번역해보면 어떨까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습니다. (웃음) 주이 말투를 간사이어로 한다..(웃음) 팔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이상 하루키가 <호밀밭의 파수꾼>의 새로운 번역본 출간을 기념한 인터뷰였습니다. 인터뷰 중에 그가 얘기한 것 처럼, 훌륭한 고전은 급변하는 문화 속에서 주기적으로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이 남네요. 10년만에 다시 번역하면서 그 믿음을 스스로 실천했고요. 그리고 하루키 자신의 작품의 독자들에게도 너무 내 소설을 통해서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아달라는 완곡한 그의 의중도 엿보인다는 점이 인상적인 인터뷰였습니다. :D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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