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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터뷰는 일본의 저명한 영미 번역가인 시바타 모토유키와 하루키가 가진 인터뷰에요. 시바타씨는 일본의 문예지 <Monkey>의 편집장이기도 하고, 하루키가 번역가의 선배로서 조언을 많이 구한 많지 않은 하루키의 알려진 인맥이랍니다. 하루키도 시바타씨의 조언을 받아가며 많은 영미문학을 번역해 왔는데요. 1985년 존 어빙의 작품을 시작으로 스콧피츠제럴드, 팀오브라이언,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챈들러, JD샐린저, 트루먼카포티 등 지금까지 약 50여편의 문학을 번역했답니다. 장편 소설을 쓰는 와중에도 하루의 일정 부분은 번역을 하는데 할애해 온 그의 꾸준함과 근면함을 잘 알 수 있죠.

 

이전 포스팅에서는 시바타씨와 하루키 본인이 번역하는 작가의 라인업이 달라 다행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죠. :D 서론이 길었는데요. 이번 인터뷰는 하루키가 2003년에 처음 번역한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1951년)을 2014년 새롭게 번역을 해서 출간한 기념으로 출판사인 하쿠스이사(白水社) 사이트에 공개된  인터뷰입니다. 하루키는 원제목 <캐쳐 인 더 라이, The Catcher in the Rye>를 그대로 가져와 번역 출간했습니다. 시바타 모토유키가 인터뷰어로 대화를 이끌어 나갑니다. 분량이 많아, 1,2편으로 나누어서 포스팅할게요.



"꽤나 이상한 소설이에요. 잊을 수가 없었어요."

하루키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新번역 출간 인터뷰(1)

출처: 하쿠스이사 홈페이지


시바타: 첫 질문으로 무라카미씨는 언제, 어떻게 1951년작 <캐쳐 인 더 라이>을 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하루키: 전 60년대 중반에 고교생이었는데요. 당시 <캐쳐 인 더 라이>를 읽는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와도 같다고나 할까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60년대의 고교생이라던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읽어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읽어 보고 어딘가에 버려두지 않았을까요. 어땠을까. 아, 아니네요. 같은 반 여학생의 권유로 읽은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웃음) 


시바타: 당시 처음 읽었을 때의 감상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하루키: 꽤 오래된 일이라 분명한 기억은 없어요. 단, 문체에 강하게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 소설 속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잊혀지기 마련이잖아요. 단, 몇 가지 세심하게 묘사된 정경들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언덕 위에 있는 학교라던지, 스펜서 선생님이 읽어주던 이집트인에 관한 에세이라던지 스트래들 라이터가 면도를 하는 장면 등은 기억에 남아있지만, 주인공 홀드 콜필드가 뉴욕으로 간 이후의 장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었죠. 그래서 내용적으로는 크게 감명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얘기했듯이 문체는 계속해서 제 머릿 속에 남아있었어요. 특히 소설의 도입부의 신선한 묘사는 압권이라고 생각해요.


시바타: 노자키 타카시씨의 번역본으로 읽으신거겠죠?


하루키: 물론이죠.


시바타: 고교 시절에 처음 읽으시고, 노자키씨의 번역본으로 몇 번 더 읽으셨나요? 아니면 원문으로 읽으셨나요?


하루키: 아니오. 처음 읽고는 노자키씨 번역본으로는 다시 읽지 않았어요. 책장에 책은 가지고 있었지만, 다시 읽은 기억은 없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처음 읽고 그 때 뿐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원문은 대학교에 가서였을까 읽어보았어요. 제대로 정독한 것은 아니었고, 부분적으로 읽으면서 아 이런 내용이었구나라고 생각해보는 정도로 말이죠. 그 당시는 저도 이미 '하드'한 노선을 타고 있었다랄까요.


시바타: '하드(Hard)'한 방향이라는 건?


하루키: 좀 더 딱딱해졌다랄까요. 반문화적으로 옮겨갔다고 할까요. 이것도 당시 우리 세대의 스테디셀러 코스였어요. 왠지 모르게 <캐쳐 인 더 라이>로 입문해서 점점 하드화해가는 과정이죠. 예를 들어, 조르주 바타이유나 윌리엄 포크너 혹은 헨리 밀러, 리처드 브로티건, 커트 보네거트 같은 작품들 말이에요. 아니면 J.G 발라드의 공상 과학 소설 같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 버리곤 했죠. 


시바타: 즉, <캐쳐 인 더 라이>의 세계는 졸업했다는 의미로 봐도 되겠군요.


하루키: 맞아요. 투쟁시대로 들어가면서 부터는(하루키가 대학 생활을 시작한 이듬해 부터 전공투 운동이 시작됐죠.) 아무래도 이 소설은 부르주아라고 할까요..


시바타: 부자 도련님의 이야기죠..


하루키: 그 속에서 반항하고자 하는 도련님의 신경질적인 이야기 잖아요. 특별히 제 마음 속에서 이 작품에 대한 어떤 정리를 한 건 아니었지만, 다시 차분하게 읽어보고자 했던 마음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 샐린저의 다른 작품들 모두 읽었지만, <캐쳐 인 더 라이>는 다시 읽지 않았어요. 이 작품에 빠지지는 않았다고 할까요. 무언가 독자로서 작품이 내게 "온다"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겠죠. 당시는 카포티의 작품이 저에게 "왔어요" <캐쳐 인 더 라이>는 저에게 "오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 이후 제 삶 속에서 이상한 기운으로 계속 남아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제 안에는 항상 <캐쳐 인 더 라이>가 있었어요. (이는 하루키의 1987년 작품 <노르웨이의 숲>의 등장인물들이 몇 번이나 이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에서도 알 수 있죠.) 제 말대로라면 이 소설은 꽤나 이상한 소설이 되어버리겠군요. 쉽게 잊을 수가 없어요. 제 시야의 가장자리에 끈질기게 자리잡고 있어요.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거나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던가 그런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시바타: 그런 무라카미씨가 말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캐쳐 인 더 라이>를 03년도에 처음 번역을 했고, 이번에 다시 번역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루키: 그건 제 자신 속에 깊숙히 남아있는 알 수 없는 기운 때문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게 있어서 이 소설의 존재감이라는 것에 대해 한 번 철저하게 문장으로 재조사해보고 싶었던 마음이랄까요. 나름대로 재평가 혹은 재검증을 해보기 위함이 컸어요. 그리고 제 주위에 제가 직접 <캐쳐 인 더 라이>를 번역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친구라든지, 편집자라든지. 일반 독자들에게도 그런 편지가 꽤 많이 왔었죠. 그래서 저도 처음엔 "그래? 내가 그 작품을?" 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곤 한동안 "그래, 그 작품 번역도 재미있겠네."라고 생각하고 말았죠. 그러다 점점 신경이 쓰였다고 할까요. 내가 <캐쳐 인 더 라이>를 번역하면 과연 어떤 문체로 진행해야 될까라든지 그런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죠. 그럴수록 점점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죠.   


시바타: 무라카미씨는 번역하는데 있어서도 문체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큰 편이신가요?


하루키: 네 그래요. 저는 문체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가장 컸어요. 고전, 이제 고전이군요. 책이 나온지 50년이 되었으니까요. 고전이 된 <캐쳐 인 더 라이>를 비로소 한 번 제 손으로 번역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고민한게 문체였죠. 고전이 된 이 작품을 내가 어떤 문체와 스타일로 번역할 수 있을까 말이에요. 


시바타: 실제로 번역을 하고 나서, 이 책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하루키: 바뀌었죠. 꽤나 많이 달라져 버렸어요. 고등학교 당시 제가 읽은 노자키씨의 번역본과는 기질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요. 물론 노자키씨의 번역본을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말이에요.


시바타: 제가 읽어 본 바로도 정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 노자키씨는 피츠제럴드나 존바스도 훌륭하게 번역하셨고, 뛰어난 번역가라고 생각해요. 번역하는 이유랄까요. 그런 것도 정확하고 깔끔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지, <호밀밭의 파수꾼>이 일본에 최초로 출판된 것이 원문이 출간된지 13년 뒤인 1964년이기 때문에, 그때 부터도 벌써 40년이 흘러버린 시점이잖아요. 40년이 지나면서 원본 텍스트의 의미 같은 건 꽤 많은 변화를 겪는다고 생각해요. 번역을 할 당시의 문화적 배경도 상당히 변화하고 있으며, 독자의 의식은 물론이고 일본어의 문체 자체도 바뀌어 왔죠. 그런 의미에서 문학사적인 무게를 지닌 작품들은 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문체와 배경으로 다듬어지면서 독자들에게 몇 가지의 선택지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캐쳐 인 더 라이>는 시종일관 구어체를 사용하고 있잖아요. 구어체라고 하는 것은 당시 사화의 유행하는 풍속적인 요소를 어쩔 수 없이 다분히 포함한다고 생각해요. 그 점을 어떻게 번역자가 건드리고 다듬는지에 따라서 전반적인 뉘앙스라든지 의미 같은 것들이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60년대라고 하면 아직 이시하라 유지로가 청춘 영화에 등장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풍속적인 표현들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겠죠. 그런 부분에서 역시 지금과는 조금 어긋난다랄지, 온도차 같은 것이 나타나게 되는 거겠죠. 물론 번역의 한계점이라는 측면의 문제도 있을 겁니다. 여하튼 문화적인 배경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 건 항상 염두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또한, 이것은 문화적인 유행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캐쳐 인 더 라이>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홀든이 "당신, You"을 향해 말을 걸어 오는 작품 구조를 취하고 있죠. 그 "You"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혹은 그 존재를 어떤 식으로 파악하는지에 따라 번역 작품의 문장은 물론 작품 자체의 구조가 달라져 전반적인 인상도 변화될 거에요. 제가 기억하는 한, 노자키씨의 번역 작품에서는 "너, 君の"라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아요.


시바타: 그렇네요. 뭐 어느 정도는 나옵니다만, 소위 말하는 일본의 번역 방식에 따라 많이 줄여진 느낌도 있습니다.


하루키: 전 그것과는 반대로, 이 소설에서 You라는 가상의 존재가 작품에 의외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고 텍스트를 다시 읽어보면서 느꼈어요. 그럼 이 "너"라는 존재가 도대체 누구인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소설의 하나의 장치로서 작용하는 부분도 있고요. 


시바타: 그점이 제가 무라카미씨 번역본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입니다. 노자키씨의 번역본은 홀든이 혼잣말을 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면, 무라카미씨의 번역본은 홀든이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말을 거는 대상인 "You"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존재인지는 역시 제대로 알 수가 없죠. 그런 이유로 무라키미씨의 번역본이 꽤나 흥미있게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좀 전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만, 막상 번역해 보니 작품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고 하셨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하루키: 제가 처음 노자키씨의 번역본으로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은 고등학생 소년이 신경질적으로 사회의 위선에 대해 싸우려하고, 성인들의 가치관을 거스르며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뭐 그런 인상이 머리에 강하게 남아있었어요. 그것이 노자키씨의 번역 때문인지, 당시 소설을 읽었던 제가 받아들였던 마음의 문제였는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지만, 이번에 제가 원문을 다시 읽어 보고 느낀 점은  그런 점도 물론 있지만,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의미는 홀든 콜필드라고 하는 소년의 내면적 갈등이라는 "내 존재를 어디로 이끌고 갈까"라는 개인적인 투쟁만이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점이 다르게 다가왔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시바타: 사회에 맞서는 건 아니고요.


하루키: 네. 사회에 맞서고자 하는 건아니고요. 물론 그런 것들이 보이긴 하는데,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식 상태와의 싸움이라는 부분에 무게가 실려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번역하면서도 그러한 관점에서 이야기의 전체를 바라보고 갔죠. 관점에 근거한 방법이라고 할까요.


시바타: 그렇게 되면 "You"라는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하루키: 그렇게 되죠. 하나의 생각은 "너"라는 자신의 순수한 투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즉, "또 다른 자아"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부분을 독자가 어떻게 느낄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바타: 이 소설의 주 테마는 홀든의 내면 혹은 내면의 갈등이 아닐까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를테면, 홀든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소년인지에 대해서 번역자로서 정리된 게 있으신가요?


하루키: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완전히 작가 샐린저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제가 이번에 번역을 위해 다시 읽어보고 느낀 재미있는 것은 소설 속에 여러 '놈'들이 나오잖아요. 대채로는 "빌어먹을 놈들"이죠. 홀든의 말을 빌리자면 "bastard"인데, 소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분명히 어느 정도 샐린저 자신의 투영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들이 이 소설의 놀라운 깊이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다시 읽고 곰곰히 생각해 본 문제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홀든이라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단순한 시시한 세상 놈들이라는 느낌 밖에 가지지 못했었죠. 샐린저 작가 주위에 실제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라드 라이터 같은 인물도 실제로 작가의 고등학교 시절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실제 인물들도 소설 속에 들어오게 되면, 작가 자신의 자기 혐오나 욕망에 투영되게 되는 부분이 있죠. 그런 방식으로 읽기를 해 나가면, 과연 독자 스스로 납득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DB, 피비, 애리와 같은 홀든의 형제자매에 관해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완전한 작가의 자기 분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래스일가도 마찬가지겠지만, 역자로서는 더 깊게 분석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여동생 피비는 유아적인 순결성이 가장 강하고 이상적인 형태로 작용하고 있고, 그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을 변경해가며 더 명확하게 되고 있어요. 남동생 애리는 이미 죽었죠. 즉, 이들은 박물관의 유리관에 담겨 보관되고 있는 순수에요. 형인 DB의 경우 30세에 작가가 된 모습으로, 샐린저 작가 자신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였지만, 현재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인  DB의 모습을 다소 희화화하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인터뷰 번역 1편을 마칠게요. 저도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호밀밭의 파수꾼>인데, 하루키가 번역한 포인트에 맞춰 다시 한 번 읽어야 겠습니다. 국내 번역본만해도 엄청나게 많네요. 어느 번역본으로 읽을지 선택하는 것도 큰 일이네요. :D 이어서 2편 포스팅은 곧 찾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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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mart4you 2014.05.21 16:36 신고

    하드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키 상...
    하드 보일드가 정말 또렷하게 무얼까 궁금해서 레이먼드 챈들러를 좀 파보려고 했는데...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뭐랄까 영화에서 점프컷처럼 탁탁탁 끊어지는 느낌이 강한 작품이라..
    요즘 보고 있는 롱 굿바이라는 작품도, 드라마도 상당히 이런 느낌이 강해서...
    저런 느낌이 하드인건가 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하루키상의 이미 하드한 노선을 타셨다는 인터뷰가 마음에 닿네요! ㅎ

    워낙 인터뷰 매니아라서 인터뷰 올려주실 때마다 꼼꼼하게 잘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2. madeinfinger 2014.05.23 10:17

    잘 읽고 갑니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하루키의 모습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