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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통신/하루키 관련 기고글

하루키를 통해 나를 발견한 사람들 - 월간 채널 예스 기고(17년 8월)

by finding-haruki.com 201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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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해드릴 글은 예스24에서 발행하는 월간 채널 예스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8월호에 하루키 특집을 마련하여, 하루키와 관련한 의미있는 작업을 진행한 작가들에 대한 소개와 그들이 추천하는 여행지 혹은 하루키 작품에 대해 소개한 기획기사 였는데요. 저도 <하루키를 찾아가는 여행>의 저자로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참여한 저자분들로는 <하루키 레시피>의 차유진 작가님, <당신의 하루키, 나의 고베>의 조아라 작가님입니다. 기사는 총 4개의 질문에 대해 답하는 형식이고요. 포스팅하는 글은 제가 보내드린 원고의 내용이고, 실제로 월간 채널 예스에 실린 내용이나, 아래에 링크해 드린 웹 기사의 내용과는 조금 상이하답니다. 지면의 여건에 따라 줄여진 부분이 있다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채널 예스 기사 링크: http://ch.yes24.com/Article/View/34207


사진: 니시노미야 슈쿠가와 오아시스길 (하루키가 건너다녔던 다리 <랑게르한스섬의 오후>)


Q: 하루키를 처음 접하게 된 시기와 그의 팬이 된 이유, 그리고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자신이 마음을 빼앗기게 된 그만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2004년 여름이었어요. 당시에도 올 여름 처럼 폭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루키를 처음 만난 광화문 교보문고의 일본 문학 코너는 분명히 시원했겠죠. 그 코너에 유독 많이 진열되어 있는 책이 있었어요. 바로 하루키의 10번째 장편 소설 <해변의 카프카>였는데요.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던 책의 표지에 이끌려 바로 책을 사서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읽기 시작했죠. 한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라는 드라마틱한 경험을 했다고는 말 못하지만, 그것도 이유가 있었답니다. 읽으면 읽을 수록 뭐랄까 작가가 설치해 놓은 함정 혹은 동굴에 빠져버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게 바로 하루키가 추구하는 '매직 리얼리즘'이라는 장르로 구분되어 질 수 있는 하루키만의 작법이라는 것을 지금에서는 알 수 있죠. 또한 <해변의 카프카>는 카프카라는 13살의 소년과 나카타라는 노인이 도쿄에서 시코쿠로 향하는 각각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소설로, 당시 사회로 내몰리기 직전의 저로서 많은 위로를 받은 소설이랍니다. 카프카 소년에게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나카타 노인에게는 젊은 세대를 앞서간 어른으로서의 줄 수 있는 아직 분명히 존재할 희망과 치유에 대한  메세지를 받을 수 있었답니다. 그렇게 처음 접한 그의 소설이 저에게는 물론 대중적, 비평적인 평가로봐도 이토록 엄청난 소설이었으니,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세계에 심취하면서 점점 더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죠. 


Q: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의 책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각인효과일까요. 학창시절 교과서 속의 (대부분 국내 작가의) 문학작품만 접하다가 사실상 처음 제 의지로 소설을 골라 읽은 게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였습니다. 중학교 시절 교과서 외에 처음 접한 소설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작가의 <닥터 지바고>였지만, 어머니가 사다주신 소설이라 제외할게요. 그 각인 효과가 너무 컸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골수팬이 되었고, 가장 좋아하는 작품도 <해변의 카프카>랍니다. 그리고 교과서의 소설 중에 좋아하는 소설로 <삼포가는 길>이 있는데요.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서도 <삼포가는 길>과 같이 로드무비식의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야기 전개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도저히 책을 손에서 놓을 수 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하루키의 작법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디테일한 묘사, 현실의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상황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전갱이 같은), 그 두 세계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법과 이야기 전개에 매료되었죠. 고양이와 대화가 가능한 나카타 노인의 독자로서 애정을 한 없이 줘도 모자랄 설정도 한 몫 했던 것 같아요. 아마 이때 부터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지금 불현듯 들었습니다. 


Q: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에 대한 컨텐츠를 기획하고 책을 낼 수 있었던 계기 혹은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대학 생활 4년을 춘천에서 했는데요. 당시에 욘사마를 배출시킨 드라마 <겨울연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을 때랍니다. 드라마가 끝날 때 쯤 일본 관광객들이 드라마 속 욘사마의 본가인 춘천집을 보기 위해 쏟아져 들어왔었죠. 그 일본 여행객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성장한 혹은 그의 소설 속의 생생한 장면 속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대학교 1학년때 매일 인문대 독서실에서 훔쳐봤던 중문과 선배 자취집 앞에서 선배를 밤새 기다렸던 마음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이유 말고는 더 설명드릴 것이 없답니다. 정말 그 마음 뿐이었으니까요.  


Q: 책을 쓰면서 하루키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거나 그에 대한 팬심이 더 깊어진 에피소드가 있나요.


하루키는 태생적으로 일본인 작가입니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국내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걸로 유명하죠. 제가 흠모하던 박완서 작가님도 하루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고, '일본인의 전형이 아니라 언어의 변방을 훌쩍 뛰어넘은 세계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죠. 그런데 그의 모국인 일본은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수정하려고만 하는 역사적인 인식 문제는 지탄받아야 마땅하기에, 하루키 역시도 일본인 작가로서 역사관에 대한 오해를 받아온 것이 사실 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매스미디어에 노출되는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그의 역사관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하루키의 지론대로 소설가는 소설로서 얘기해야한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지지를 보냅니다. 저도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를 흠모하고 있지만, 그의 역사관이 좀처럼 작품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기에, 심지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는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자국민을 위로하는 듯하게도 비춰져 그 오해는 커지면 커졌지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루키를 알면 알 수록, 그가 이미 예전 부터 일본의 행정관료, 정치가들의 역사관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작품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일본 내의 비평가들의 글을 읽어 보면, 하루키는 <중국행 슬로보트> 등의 초기 작품집을 통해 전쟁으로 아픔을 겪은 중국인들에게 항상 죄스런 마음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에 대한 저의 애정은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답니다. 블로그를 통해 그의 전 세계 인터뷰를 소개해오면서, 그런 하루키의 적극적인 사회적 발언을 하려는 태도 변화는 2011년 카탈로니아 국제상 수상 연설을 기점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해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원전사고 까지 발생하였죠. 하루키는 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대한 가슴 아픔과 함께 원전사고라는 인재가 이어져 발생했다는 것에 분노를 표출하였거든요. 그때 부터 하루키는 사회적인 발언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분쟁으로 중국에서 그의 소설들이 퇴출되려는 움직임을 보일때에도 신문에 사설을 내어 값싼 취기어린 감정으로 일본에서도 그런 문화적 보복 행동을 하여, 영혼이 오가는 문화 교류까지 막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자고 일본 정부에 메세지를 전했고, 안데르센문학상 수상 연설에서는 일본 정부의 역사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그림자>라는 안데르센의 작품에 비유하여 과거의 어두운 면을 무조건 숨기고 바꾸려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했죠. 특히,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일찍이 1990년대 그의 해외 인터뷰를 접해보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한국과 중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위안부에 대해 아무 문제 없었다는 식의 일본 정부 태도에 대해 매우 부끄러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꾸준히 작품을 내면서도 이제 작가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선 그가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 작가라는 그의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 혹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세상을 조금은 더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에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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