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루키 통신/하루키 인터뷰

하루키 2006년 '위대한 개츠비' 번역 기념 이메일 인터뷰

finding-haruki.com .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루키는 소설가이자 동시에 번역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을하면서, 다양한 선배 작가들의 '구조'를 공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하루키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다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또 그에게 번역이란 자신의 내면으로만 파고드는 소설을 창작하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일종의 '번역 치유'로도 기능하고 있답니다. 하루키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나의 잃어버린 도시>를 그가 작가로 데뷔하고 2년이 지난 1981년 처음 번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해외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해왔답니다. 그런 그가 2006년 스콧 피츠레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 출간하게 되면서 요리우리 신문사와 이메일 형식으로 인터뷰를 가졌는데요. 하루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이라고 얘기하는 작품을 데뷔하고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소 늦게 번역하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요. 그 이유에 대해 들어보시죠.



사진 http://archive.tehelka.com/



일본 독자들에게 '성숙'이라는 의미의 중요성을 전달하고 싶어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며, 무라카미 하루키 요미우리 신문 인터뷰


요미우리: 스콧 피츠제럴드 작가의 <위대한 개츠비>가 첫 출간된지 80년이 지난 시점에 무라카미씨의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무라카미씨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고, 60살이 될 무렵에 번역해 보고 싶다고도 하셨는데요. 그 바램이 이번에 57세가 되신 해에 드디어 이뤄졌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시나요.


하루키: 우리가 어느 하나의 고전 소설을 지금 이 시대에 읽는 것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소설이 지금의 시대에 읽어도 주인공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현대에도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이 주인공이 도대체 왜 저런 단어를 쓰지라던가,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할까라는 식의 의문이 들지 않고 그 소설 속의 각각의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죠. 


제가 이번에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도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런 소설은 드물어요. 물론 그리스 비극과 일본 설화인 겐지 이야기, 세익스피어 역시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작품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각각의 장면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연유로 등장하는지 혹은 현대 사회에서 비판을 할 지, 수용하게 될 지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묻고 있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물론 독자 각각에 따라 달라지겠죠.


요미우리: 피츠제럴드의 시대와 오늘날 일본 사회와 공통점이 있을까요?


하루키: 피츠제럴드의 테마 중 하나는 성숙-개인의 성숙과 사회의 성숙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20대는 미국 사회에 있어서 매우 특별했던 1920년대 였죠. 그의 청춘 시절과 사회의 청춘이라 부를 만한 시기가 아주 밀접하게 상호 대응하여 일치화되어 시대가 앞으로 계속 나아갔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미국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젊은 피츠제럴드는 그런 명성을 즐기며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었어요.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이와 같은 시대를 묘사하며 등장하게 되었고, 피츠제럴드는 앞으로 다가 올 혼란스러운 시대의 어두운 면을 정확하게 캐치해 내고 있어요. 


피츠제럴드는 소설 속 등장인물 '닉'을 통해 당시 사회의 여러 행태들이 무언가 계속해서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얘기를 진행시켜 나가죠. 그는 또한 당시의 사람들은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 충분히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었을 수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마냥 좋기만 했던 당시의 호황의 유혹의 시간을 지나며 달콤한 과일을 삼키듯이 그 무엇도 이뤄내지 못하고 모두 놓쳐버린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를 겪게 됩니다. 그것은 화려했던 1920년대와 달리 어두운 시대이죠. 모든 미국 사회가 그랬듯, 작가 피츠제럴드 역시 공허한 사회 속에서 절망감에 가득 차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길에서는 멀찌감치 벗어나 버렸으니까 말이에요. 


저는 바로 피츠제럴드가 겪은 당시의 상황이 바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버블 경제가 무너진 1990년에서 2000년의 시기와 같다고 생각해요.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일본 사회는 어느 정도 과거의 실패를 발판 삼아 성숙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혹은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이 <위대한 개츠비>를 일본 독자들이 읽어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 독자들 스스로 정말 그들이 놓인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요미우리: 무라카미씨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얘기할 때, 한 마디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크나큰 영향을 준 작가라고 얘기하시는데요. '운명'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될까요?


하루키: 말로 설명하기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닌 사람과 소설의 만남으로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그런 만남 속에서 운명적인 만남도 존재할 것이고요. 이러한 만남은 때로는 당신의 인생을 확 바꿔버릴 수도 있어요. 이런 만남은 새로운 문으로 다가가 그 문을 열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아요. 좀 더 부연하자면 당신의 몸 전체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는 느낌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위대한 개츠비>는 저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소설로 남다르게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답니다. 


요미우리: 무라카미씨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계신데요. 번역가의 입자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또 어떻게 다가왔는지 궁금합니다.


하루키: 전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접하면서, 제가 소설을 쓰는 직업에 있어서 좀 더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때론 좀 더 세련되어지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처음 그의 작품을 읽었을 때, 하나 하나의 문장들이 저에게 있어 각기 깊은 의미를 지니고 모든 문장들은 유기적으로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느낌도 받았답니다. 전 어떤 소설의 경우 계속해서 다시 읽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데요. 대부분의 소설들은 반복적인 읽기 과정을 통해 , 아 이런 부분은 이렇구나하고 어느 순간 그 작품에 대해 명료해지는 부분이 생기곤 하는데요. 그런데 <위대한 개츠비>는 달랐어요. 소설을 다시 읽으면 읽을 수록 계속해서 다양하고 깊어지는 의미를 찾게 되었답니다. 이번 번역을 끝냈을 때도 마찬가지로 어떤 새로운 빛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요. 


우리는 현재 바쁘고 효율만 추구하는 삶 속에서 우리의 어떤 깊은 가치를 찾는 것 자체를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나요? 천천히 우리가 보고 싶은 것, 추구하는 것을 지그시 눈으로 지켜보고 의도적으로 서두르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바로 개츠비가 저에게 는 그런 과정을 연습하게 해줍니다. 정신적인 지주랄까요. 저를 붙잡아주는 닻이랄까요. 전 그렇게 <위대한 개츠비>를 마음 속 한 켠에 두고 작가라는 하나의 길을 걸어나가고 있답니다.


요미우리: 만약 무라카미씨가 <위대하 개츠비>를 읽지 않았다면, 무라카미씨는 소설을 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하루키: 글세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설을 보는 관점은 항상 다른 가능성이 소설 속에 잠재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주인공은 개츠비와 나레이터인 닉, 그리고 경쟁 상대인 톰 뷰캐넌인데요. 피츠제럴드는 이 3명의 등장인물을 보는 관점을 달리하면서 세명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이 매우 놀랍습니다. 소설에 있어서 이런 부분은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죠.  


요미우리: 무라카미씨의 다음 작품은 <위대한 개츠비>와의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을까요? 


하루키: 아니요, 하지만 언젠가는 개츠비에 대한 혹은 관련한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아직 이 소설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요. <위대한 개츠비>는 오랜 시간 저에게 있어서 비밀스러움 혹은 외로움의 암시를 전해주는 소설이랍니다.


요미우리: 무라카미씨는 소설 속에서 종종 피츠제럴드 작가를 모델로 하여 등장인물을 만들어 내기도 하시나요? 혹은 피츠제럴드의 실제 삶의 모습이 무라카미씨의 실제 삶의 모습과 닮으 부분이 있을까요? 피츠제럴드는 실제로 비정상적인 부분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루키: 소위 말하는 천재로 알려진 사람들에게 평범한 개인 생활의 방식이나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천재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적용할 수 있겠지만요. 제가 천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그런 천재성은 만들어진다는 점이에요. 천재는 모든 종류의 삶(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예술적인 의미에서도)에 있어서 하루 하루의 삶이 평범하지 않은 때로는 나쁜 일들로 둘러 쌓이게 되는 것 같아요. 피츠제럴드는 후세에게 의미있는 작품을 남기고 또한 멋진 육체를 남기고 죽게 되었죠. 젊은 시절 요절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순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가 천재였다는 것이죠. 피츠제럴드는 그의 놀라운 재능을 살린 몇 가지의 멋진 작품을 남겼죠. 전 그런 자연스럽고 동시에 매혹적인 캐릭터에 매료되었고요. 그건 바로 제가 소설가라는 직업에 있어서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천개가 아니에요. 전 제 삶의 여러 측면들을 제어하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답니다.   


요미우리: 무라카미씨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난 44세의 나이를 지나셨는데요. 그 사이 피츠제럴드 만큼 무라카미씨에게 영향을 준 다른 작가를 찾아 볼 수 있을까요?


하루키: 제가 그가 죽은 나이를 지났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저에게 어떤 작가로서의 모델 혹은 지향점을 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당신이 제가 작가로서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묻는 거라면, 전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건 분명히 지나치게 야심찬 목표일 수 있지만, 자신 스스로에게 목표는 높게 설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피츠제럴드는 죽기 전까지 작가로서의 사명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소설 속 개츠비가 강 건너 반대편의 녹색 빛을 바라보는 것 처럼, 제 이야기도 이 우주 속에서 하나의 빛을 내기 위해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정말이지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인터뷰였습니다. 메일 인터뷰라 말로 한게 아닌, 글로 쓴 내용이라는 게 왠지 더 모르게 뭉클하게 다가오는 그런 인터뷰였던 것 같습니다. 하루키의 다음 작품과 앞으로의 작가로서의 행보도 계속 응원합니다! fin.




댓글
 
   
 
댓글쓰기 폼
공지사항
Total
750,585
Today
161
Yesterday
232
«   2018/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