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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부제: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란 타이틀로 지난 6월 일본의 문예 월간지 '문예춘추'에 하루키의 글이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글이 실리자마자 역시 화제가 되어, 바로 증쇄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던 것이 사실인데요. 이번 기고글을 통해 하루키의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충분히 상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9년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1Q84>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 개선이 이뤄졌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요, 그 부분에 대한 내용도 상술하고 있네요. 일본 문예춘추에 실린 글 전문을 필립 가브리엘이 번역했고요, 좀 길지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어 내려가 보시죠.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9/10/07/abandoning-a-cat

 

  • <고양이를 버리다,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18살이 되어 집을 떠나기 전까지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같은 지붕 아래에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과 부모들 사이 처럼, 제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좋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생한 기억 중에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도 꽤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족이 니시노미야시의 슈쿠가와에 살던 어느날,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고 오기 위해 해변가로 간 일이 있었습니다. 새끼 고양이가 아니라 나이가 든 암고양이였는데, 왜 그 고양이를 버려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정원이 있었고 고양이가 지내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는 단독 주택이었답니다. 아마 고양이가 임신을 해서 부모님이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당시 고양이를 버리는 일은 흔한 일이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만 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중성화 수술이 보편적으로 이뤄지던 시기도 아니었고요. 당시 전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고, 아마도 1955년 즈음이었을 겁니다. 집 근처에는 미군의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된 은행 건물의 잔재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그 여름날 오후에 고양이를 버리기 위해 해변가로 갔습니다. 제가 고양이를 넣은 상자를 안고 자전거 뒤에 타고, 아버지가 페달을 밟았죠. 우리는 슈쿠가와 길을 따라 고로엔 해변가에 도착했고, 해변가의 나무들 사이에 상자를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 왔답니다. 해변은 집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우리는 고양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나누며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우리가 버린 고양이가 집에 돌아와 있었답니다. 고양이는 긴 꼬리를 세우며, '야옹'하며 우리를 반겼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인데, 당시 우리는 그 자리에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죠. 그러다가 아버지의 표정은 감탄으로 바뀌어 갔고, 이내 안도의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다시 우리의 가족이 되었답니다.

저희 집에는 항상 고양이가 같이 살았고, 우리 가족은 모두 고양이들을 좋아했죠. 저는 형제자매 없이 자라서 고양이와 책이 가장 좋은 친구였고, 고양이와 함께 베란다에서 앉아 햇볕을 쬐는 것을 좋아했답니다. 당시에 왜 우리가 고양이를 해변으로 데려가 버렸어야 했는지, 왜 그 일에 대해 항의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버려진 고양이가 어떻게 다시 우리 집에 와 있었는지에 대한 것과 함께 여전히 답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아버지와의 또 다른 기억은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식사전에, 집 안에 있는 불단 앞에 앉아서 눈을 감고 불교 경전을 낭송했습니다. 작은 원통형 유리 케이스 안에 아름다운 보살상이 조각된 불단이었죠. 아버지는 왜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일반적인 불단이 아닌 그 유리 케이스 안의 불단을 향해 경전을 외우셨을까. 이 의문도 제가 답을 얻지 못한 질문 중 하나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분명히 중요한 의식이었으며, 매일의 시작을 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아는 한, 아버지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데에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의무를 행하는데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죠. 그 행위는 단순히 습관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일을 할 때의 아버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한 곳에 정신이 오롯이 집중된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인지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셨는데, 전장에서 죽은 동료 일본 군인과 당시 상대국이었던 중국 군인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더이상 상세하게 얘기해주지는 않았고 저도 더 묻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제가 더 물었더라면 아버지는 조금 더 얘기해 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제가 더 궁금해하지 못하게 된, 당시 그 순간의 공기 혹은 느낌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성장 배경에 대해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인 제 조부 무라카미 벤시키는 아이치현의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조부도 승려로 교육을 받기 위해 지역의 사원으로 보내졌고, 그는 꽤 유망한 학생으로 사원의 견습을 마치고 교토의 안요지의 주지로 임명됩니다. 이 사원에는 대략 4~500명 정도의 신도가 있었기에 꽤나 큰 직책을 맡은 것이었죠. 저는 오사카-고베 지역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조부의 교토 사원에 방문할 일이 거의 없었고, 그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습니다만, 제가 기억하는 조부는 술을 매우 좋아했고, 상당히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소위 말하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조부의 이름에서 느껴지듯이-'벤'은 '웅변'을 의미합니다.-그는 매우 유능하고 촉망받는, 신도들로 부터도 인기 있는 승려였고, 저는 조부가 큰 목소리를 가진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다는 기억도 가지고 있습니다. 

조부는 6명의 아들을 두었고, 혈기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슬프게도 1958년 8월 25일 아침 그의 나이 70세에 철길을 건너다가 열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토와 오츠를 연결하는 케이신선이었고, 히가시야마구 야마다초에 있는 무인역사였습니다. 이 날은 큰 태풍이 이 지역을 지나고 있었고, 비가 많이 내려 조부는 우산을 들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마 곡선을 그리며 굽어 들어오는 열차를 잘 보지 못했을 겁니다. 귀가 약간 어두웠기도 했습니다. 

조부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날 서둘러 교토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무슨 일이있어도, 당신이 사원을 물려받는 것을 원치 않아요!"라고 간청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9살이었지만, 그 이미지는 마치 흑백 영화의 기억에 남는 장면처럼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가 그때 마음을 굳게 정했다고 느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1917년 12월 1일 교토 사쿄구 아와타구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평화롭던 다이쇼 시대가 저물고, 우울한 대공황 시대와 함께 중일 전쟁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으로 이어진 시대였습니다. 그 후 아버지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전후 초기의 혼란과 가난의 시대가 왔죠. 앞에 얘기했듯이 아버지는 6명 형제 중 한 명이었고, 그들 중 3명은 중일 전쟁에 징집되어 전투에 나섰지만 기적적으로 심각한 부상 없이 살아남았습니다. 6명의 아들은 모두 조부의 지주 자리를 물려받을 자격이 충분했죠. 그들 모두는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요. 예를 들어, 아버지는 군대로 치면 소위 정도에 해당하는 사원 내에서의 직책을 부여받기도 했습니다. 여름 오봉절에는 6명의 형제가 돌아가며 교토 사원을 돌보고, 밤에는 모여서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조부가 돌아가신 후, 누가 사원의 지주 역할을 물려받을지에 대해서 긴급하게 논의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고 직업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조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장남인 무라카미 시메이 삼촌은 수의사가 되길 원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오사카의 세무서에서 계장으로 근무 중이었고, 차남인 제 아버지는 오사카 지역의 고요카쿠인 중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거나, 인근 불교 계열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형제 들도 교사였거나, 불교 계열 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형제 중 2명은 다른 가정에 의해 입양되었는데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고, 그래서 성이 다릅니다. 여하튼, 그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사원 지주의 의무를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지만, 그 누구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큰 사원의 지주로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사실을 모두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할머니는 말도 안되게 매우 엄격하신 분이어서, 형제들의 아내 중 그 누구도 할머니와 함께 지내고 싶어하는 분은 없었을 겁니다. 제 어머니는 오사카 센바에 있는 상인 가족의 장녀였는데, 교토의 사원의 제사장의 아내가 되기에 가장 먼, 그 어떤 점도 어울리는 것이 없는 유형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제사장이 되겠다고 하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시며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제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는 아들로서 솔직하고 책임감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조부의 열성적인 성격을 물려받진 못했지만(좀 더 세심한 성격이었습니다.) 선의의 태도와 말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진실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훌륭한 제사장이 되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독신이었다면, 제사장직을 물려 받는 것에 일말의 거부감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가족이 있었기에 차마 제사장직을 이어받겠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원을 물려받은 아들은 오사카의 세무서에서 일했던 장남 무라카미 시메이 삼촌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촌은 아들이자 제 사촌인 준이치에 의해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사촌 준이치에 따르면 삼촌은 장남으로서 의무감을 가지고 제사장직을 물려받는 것에 동의하셨다고 합니다만, 아마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는 지금 보다 훨씬 교구민들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그들이 장남인 삼촌에게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영향력을 끼쳤을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나라에 있는 사원으로 승려 교육을 위해 보내졌습니다. 이는 나라의 제사장 가족으로 입양되어지는 전 단계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아버지는 견습만을 마치고 다시 교토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추위에 의해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사원의 견습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후, 아버지는 다시 조부의 아들로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이 아버지에게 깊은 정서적인 아픔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을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점을 증명할 어떤 특별한 증거를 댈 순 없지만, 제가 이런 느낌을 갖게 한 아버지에 대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버린 고양이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있었을 때의 아버지의 표정이 놀람에서 감동으로 바뀌고 다시 안심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간 것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런 경험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가족의 외동아들로 사랑을 받으며 온전하게 자라왔습니다. 그렇기 때무에 어떤 불가피한 이유나 정서적인 이유로 부모로 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어느 정도의 정서적인 상처를 받게 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가능할 겁니다. 프랑스 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어린 시절 부모로 부터 버림을 받는 아픔을 지니고 성장하여, 그의 영화는 버려짐에 대한 일관된 주제로 이뤄져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우울한 경험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1936년 히사이야마 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를 졸업하고, 18살 때 세이잔 단기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병역으로 부터 4년간 면제를 받았지만, 몇 가지 행정 서류상의 실수로 인해 1938년 아버지가 20세가 되던 해 처음 징집되었습니다. 절차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일단 발생한 사안에 대해서는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관료와 군대는 이와 같습니다. 규정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16사단(후시미 사단)의 제20 보병연대에 소속되었습니다. 16사단은 9연대(교토), 20연대(후쿠치야마), 33연대(미에현 쓰시시), 38연대(나라)의 4개의 핵심 연대로 조직되었습니다. 교토 출신인 아버지가 9연대가 아닌 멀리 떨어진 후쿠치야마의 20연대에 소속된 이유는 확실치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더 알게되면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20보병연대가 아니라 16사단의 일부인 16 수송연대에 속해있었던 것입니다. 이 연대는 후쿠치야마가 아니라 교토 후시미시에 있는 후카쿠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왜 아버지가 20 보병연대에 속해 있었다고 알고 있었을까요. 이점에 대해서는 뒤에 얘기하겠습니다. 

16사단 제20 보병연대는 난징시가 함락된 후, 처음으로 난징에 도착해 대학살을 자행한 부대입니다. 교토의 보병 연대는 비교적 온화하고 점잖은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정 연대의 경우 놀라울 정도로 잔혹한 피의 부대라는 평판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저는 아버지가 잔혹한 교토의 보병연대의 군대로서 잔혹한 공격에 참여했을까 두려웠고, 그래서 그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알아보기를 스스로 피해왔습니다. 아버지는 2008년 8월 90세의 나이로 죽을 때 까지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938년 8월에 처음 징집되었고, 난징 학살이 이뤄진 시기는 1937년 12월 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난징 학살 후 거의 1년 뒤에야 군대에 징집된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 마음 속 큰 무게의 돌이 들려진 것 처럼 엄청난 안도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16사단의 16 수송연대에 속해있던 아버지는 1938년 10월 3일 우지나항에서 병력 수송선을 타고 10월 6일 상하이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그의 연대는 20 보병 연대와 합류하게 됩니다. 일본군의 기록에 따르면, 16연대는 주로 공급과 보안 임무를 담당하며, 엄청나게 긴 거리를 이동한 걸 알 수 있습니다. 보병연대는 기계 장비가 거의 없는 말을 주 이동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전면의 상황은 매우 끔찍했고, 보급품은 동이 났고, 물자와 탄약도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군복은 모두 엉망이었고, 비위생적인 상황이 지속되면서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력과 물자가 제한된 일본 군대가 중국과 같은 거대한 국가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비록 일본군이 도시 하나하나를 순차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중국 전체 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시 20 보병연대에 소속된 군인들이 쓴 회고록은 상황이 얼마나 안타까운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수송 부대는 일반적으로 최전선 전투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그겋다고 그것이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닐것입니다. 총과 검만 지니고 있던 수송 부대는 상대가 후방을 공격해 올 때 마다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아버지는 군대에 징집되기 2년전 세이잔 단기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하이쿠시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하이쿠 서클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현대 관용구와 하이쿠의 접목에 관심을 가지고 정말로 그것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가 군대에 있을 동안 쓴 몇몇의 하이쿠시는 학교의 하이쿠 저널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전장에서 학교로 하이쿠시를 편지로 보냈을 것입니다. 저는 하이쿠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의 하이쿠시를 평가할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떠오르는 감정들을 짧은 하이쿠시로 묶는 일은 기술적인 일이라기 보다는, 열려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정직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불교의 승려가 되기 위해 양심적으로 수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서류상의 오류가 그를 군인으로 만들었고, 잔인한 기본 훈련을 거쳐 38식 소총을 지급받아 병력 수송선을 타고 잔혹한 전투에 보내졌습니다. 그의 부대는 끊임없이 저항한 중국의 게릴라 군대와 충돌하며 계속해서 이동했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서 교토 산 속의 평화로운 사원에서의 삶과는 반대입니다. 아버지는 엄청난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하이쿠시를 쓰는 것은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었을 겁니다. 그는 군대에 속해서 차마 긴 글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들, 혹은 검열로 인해 전해지지 못했던 그의 속마음이 하이쿠의 형태로 자신을 정직하게 치환해 낼 수 있는 상징적인 코드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자신이 속해 있던 부대에서 체포된 중국 군인을 어떻게 처형했는지에 대해 한 번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전 제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인지라 기억과 당시 상황이 불분명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실제로 처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얘기해줬는데, 중국 군인은 자신이 처형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항하지 않고 그 어떤 두려움도 내보이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참수 되었습니다. 중국 군인의 행동은 아버지로 하여금 존중의 감정을 가지게 만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참수된 중국 군인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중국군 포로들을 처형할 때, 아버지가 직접 참여했는지, 지켜보기만 했었는지는 사실 불분명 합니다. 제 기억이 흐리거나,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모호한 용어를 써가며 당시의 일을 묘사했는지도 판단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경험이 아버지의 영혼 속에 오랫동안 고뇌와 고통의 감정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당시 일본군 전장에서는 신병들에게 체포된 중국 군인을 처형하며, 살인을 연습하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비무장 포로를 죽이는 것은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지만, 그 당시 일본군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군대에 포로들을 둘 충분한 공간이 없었을 겁니다. 이러한 처형은 대부분 총으로 쏘거나 총검으로 찌르는 것으로 수행되지만, 아버지는 특별한 처형에는 도검이 사용되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가 얘기해준 한 일본 군인이 도검으로 냉혈한 참수를 자행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어린 제 마음에도 깊이 새겨졌습니다. 다시말해, 아버지가 겪은 무거운 짐(지금 용어로는 트라우마)은 부분적으로 아들인 저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관계가 작동하는 방식,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전이와 의식의 행위였습니다. 아버지는 전쟁 경험에 대해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처형의 장면을 기억하고 있지만, 저에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살과 피를 이어받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야기해서 전해주어야 할 강력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둘 다에게 열려진 오랜 상처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죠. 

1939년 8월 20일 20 보병연대와 아버지의 부대가 일본으로 귀환했습니다. 군인으로 1년을 복무한 그는 다시 세이잔 대학교에 복학했습니다. 당시의 징집은 2년이 기본이었는데, 어떤 이유로 아버지는 1년만 복무했는데, 아마도 첫 징집시 학생 신분이었던 것이 뒤늦게 적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아버지는 계속해서 하이쿠를 썼습니다. 1940년 10월에 쓰여진 이 하이쿠는 아마도 히틀러유겐트 조직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른다 / 사슴을 더 가까이 데려 오기 위해 / 히틀러 유겐트"

개인적으로 전 이 하이쿠를 매우 좋아합니다. 이 하이쿠는 역사의 흐릿한 순간을 미묘하고 특이한 방식으로 포착합니다. 유럽의 참혹한 2차세계 대전 전선과 사슴 (아마도 나라의 유명한 사슴) 사이에는 뚜렷한 대조가 있습니다. 일본을 잠시 방문했던 히틀러 유겐트는 곧 유럽 동부 전선에서의 끔직하고 쓰라린 패배의 아픔을 목전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전 이 하이쿠에도 마음이 끌렸습니다.

"기념일 / 이사의 죽음에 나는 여기 앉아 / 그의 슬픈 시들과 함께"

묘사된 세상은 너무 조용하고 평온하지만, 혼돈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문학을 사랑했고 선생님이 된 이후에 정말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집에는 책이 가득했답니다. 제가 10대 시절에 독서에 열정을 키웠을 때, 큰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세이잔 단기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고 졸업했고, 1941년 3월 교토 제국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습니다. 승려가 되기 위해 불교 전문 교육을 받은 후 교토 제국 대학교 입학 시험을 통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어머니는 종종 "너희 아버지는 명석했어."라고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그 점은 저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 있어 지능은 날카로운 직관보다 덜 중요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항상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버지와 비교할 때 저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죠. 저는 제가 관심있는 분야에 몰입하면 그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는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도 그랬고 이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실망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저와 같은 나이의 본인을 생각했을 겁니다. 당신이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방해 받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에게 왜 더 노력하지 않을까란 의문을 가지셨을 거고, 아버지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방해 받아 하지 못했던 일을 제가 따라가기를 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습니다. 전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 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의 수업은 대부분 지루했고, 학교 시스템은 지나치게 균일하고 억압적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저에 대해 계속적인 불만을 가지고 계셨고(그리고 어느 정도의 무의식적인 분노까지) 그에게는 고통스런 일이기도 했을 겁니다. 제가 30세때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 아버지는 정말 기뻐하셨지만, 그때까지 우리 부자의 관계는 멀기만 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느낌 혹은 그 감정이 저에게 아직 남아있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10대 시절에는 이런 일들로 집에서는 불편했고, 제 마음 한 켠에는 죄책감 같은 것이 남이 있기도 합니다. 저는 꿈을 잘 꾸진 않지만,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유독 한 문제에 대한 답을 못 쓰는 악몽을 꾼적이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이 문제의 답을 못 쓰면 시험에 실패하게 되는 커다란 결과에 직면한다는 것을 깨닫고, 큰 압박감에 식은 땀을 흘리며 깨어났죠. 하지만 당시에는 책상에 앉아 그날의 숙제를 하고 시험에서 더 나은 성적을 얻는 것은, 제가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운동을 하거나 마작을 하고, 여자친구들과 데이트를 하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고, 우리의 특별한 시간의 짐을 지고 그 범위 내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1941년 봄에 세이잔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말에 특별 징집 대상이 되었습니다. 10월 3일 후쿠치야마의 20 보병연대에서 그리고 53사단의 일부인 53 수송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1940년에 16사단은 만주에 상주하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교토에서 새로이 53사단이 창설되었습니다. 이 갑작스런 부대개편의 혼란이 아버지가 처음 후쿠치야마 연대에 배치된 이유일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저는 아버지가 처음 부터 20 보병연대에 복무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3사단은 1944년 버마로 보내져 임팔 전투에 보내졌고, 그해 12월 부터 이듬해 3월 까지의 와디강 전투에서 영국군에 의해 거의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아버지는 1941년 11월 30일 병역에서 풀려나 민간 생활로 돌아왔습니다. 11월 30일은 진주만 공격 8일전 이었습니다. 그 공격 후 일본군대가 병력을 쉽게 소집 해제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아버지가 얘기했듯이, 한 장교에 의해서 소집 해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일병 계급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교토 제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으면서, 군인이 아닌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더 봉사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라는 한 고위 관리에 의해 다시 민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대학으로 돌아와 하이쿠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중에 국가에 크게 봉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다른 요소가 있었을 것인데, 여하튼 아버지는 군대에서 나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이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이거나 들었던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교토 제국 대학의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는 1944년 10월 문학부에 등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마 제 기억은 흐릿할 것이고, 어머니가 얘기해준 사실이라면 그 단계에서 기억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1944년 10월 교토 제국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하여 1947년 9월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가 23살에서 26살 사이의 그가 군에서 나와 교토 제국대학에 입학하기까지의 3년간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버지가 두번째 군대 소집에서 풀려난 직후 미국의 참전으로 태평양에서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16사단과 53사단은 전멸했습니다. 아버지가 계속 복무했다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물론 지금 저란 존재도 없을테죠.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 동료들이 죽어가는 동안 자신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큰 고통과 고뇌의 원천이었을 겁니다. 저는 왜 그가 매일 아침 불단 앞에서 경전을 낭송했는지 이해합니다. 

1945년 6월 12일 아버지는 세번째 징집 명령을 받습니다. 이번에는 추부에 위치한 145군단의 일병으로 배치받았습니다. 군단에 구체적으로 어디에 주둔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 내에 남아있었습니다. 2달 뒤인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10월 28일에 아버지는 복무를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나이 27세 였습니다. 1947년 9월 아버지는 대학의 시험을 통과하여 교토 제국대학 문학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저는 1949년 1월에 태어났습니다. 그 나이에 아버지는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대학에서 더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고, 니시노미야의 고요가쿠인에서 일본어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결혼하게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릅니다. 그들은 교토와 오사카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서로 부모님 둘을 아는 사람이 소개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음악 교사였던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그는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오사카 센바에 있던 아버지가 소유한 한 상점은 미국의 폭격으로 타 버렸고, 어머니는 항상 그루먼 항공 모함의 전투기가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고, 오사카 시내에 가려면 항상 목숨을 걸고 가야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어머니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올해 96세그리이신 어머니도 일본어 교사였습니다. 오사카에 있는 쇼인 여자 대학의 문학부를 졸업한 어머니는 카톨릭 계열의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어머니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꽤 거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처음 겪었던 전쟁의 체험과 함께, 삶이 때때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서 좌절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곤 가끔 학생들을 때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점점 커가면서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내 때때로 우울함을 느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자주 불평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가족내에서의 불쾌한 경험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얘기해서, 저는 아버지가 훌륭한 선생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그의 제자들이 많이 온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애정과 존경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의사가 되었고, 암과 당뇨로 싸웠던 아버지를 잘 돌봐 주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분명히 뛰어난 교사였으며, 뱃속에 저를 갖고 전업 주부가 된 이후에도 많은 학생들이 집에 찾아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저는 교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성격을 형성함에 따라 나와 아버지 사이의 심리적인 불일치가 더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둘 다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생각을 터놓고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이 좋지 않은 두가지의 성격이 맞물려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재즈바 일을 하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제가 전업 작가가 되었을 때 우리의 관계는 너무 복잡해져서 거의 모든 관계를 끊다시피 했습니다. 20년 이상 서로 보지 않고 꼭 필요한 때에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다른 시대에 태어나 세상을 보는 방식은 수 마일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어떤 시점에 이 관계의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도 있었지만, 전 제 직업인 작가로서 노력을 기울이고 싶었던 것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그가 세상을 뜨기 전에 마침내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거의 60세, 아버지는 90세 였습니다. 교토의 니시진에 있는 병원이었고, 아버지는 끔찍한 당뇨병을 앓고 있었고, 암이 몸의 거의 모든 부분에 전이되어 황폐화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굳센 이미지의 사람이었지만 그때는 너무나 야위어 있었습니다. 전 아버지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생애 마지막 며칠 동안 우리는 어색한 대화들을 나누며 일종의 화해에 도달했습니다. 우리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쇠약해진 아버지를 보며 우리는 어떤 유대 관계를 느꼈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고로엔 해변으로 가서 줄무늬 고양이를 버리고 온 뒤, 다시 우리집에 와있는 당황스런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해변가의 파도 소리와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의 휘파람 소리와 향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이처럼 사소한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의 축적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 고양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제 소설 중 하나에 썼지만, 실제로 일어난 이 일을 이번 글을 통해 다시 다루고 싶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작은 흰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그당시 우리집에는 항상 고양이들이 들락거렸기 때문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이 새끼 고양이의 털이 얼마나 이쁘고 사랑스러웠는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저녁, 현관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새끼 고양이가 집 앞 정원의 큰 소나무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마치 그것이 얼마나 용감하고 민첩한 행동인지 보여주려는 것 처럼 말이죠. 저는 새끼 고양이가 얼마나 민첩하게 트렁크를 넘어 소나무 위쪽까지 갔는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새끼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도움을 구하는 듯이 애처롭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높이까지 올라가는 것은 쉬웠지만 다시 내려온다는 것이 어쩐지 무서워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나무 쪽으로 갔지만 위의 고양이는 보이지 않고 희미한 울음 소리만 들렸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고양이의 상황을 알리고 고양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사다리가 닿기엔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해가 지기 까지 울음 소리는 계속 들렸고 결국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그 새끼 고양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소나무로 갔을 때 더이상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무 밑에서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고양이는 밤 사이에 어떻게든 나무 아래로 내려왔을 것이고 어딘가로 갔을 겁니다. (그런데 어디로?) 아니면 도저히 내려올 수 없어 나무 위에서 체력이 다하고 지쳐 그만 죽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관에 앉아 귀엽고 작은 발톱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던 하얀 새끼 고양이가 쪼그라든채 죽어간 일련의 과정을 생각했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 '올라가는 것 보다 내려가는 것이 훨씬 어렵다'라는 생생한 교훈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것을 일반화하기 위해서 결과가 원인을 묻혀버리고 없애버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과정에서 고양이가 죽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사람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의 명백한 사실로서 말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아들입니다. 꽤 자명한 것이죠. 그러나 그 사실을 밝히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와 그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사고와 사건을 통해 일어난 일을 유일한 현실로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빗방울이 넓은 대지에 떨어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각자는 무수한 빗방울 중에서도 이름 없는 방울 중 하나입니다. 확실하게 개별적인 방울 이지만, 완전하게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그 하나의 빗방울에는 그 자체의 감정과 역사를 가지고 있고 역사를 계승하여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개인의 완전성을 잃어가고 집단적인 무언가에 흡수되어 버린다고 해도 지속해야 합니다. 오히려 더 큰 집단에 속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에라도 개인의 존재를 잃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저는 슈쿠가와의 집 정원에 있던 소나무로 돌아 갑니다. 그 작은 새끼고양이가 여전히 소나무 가지 위에서 백골이 된채 달라 붙어 있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저는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합니다. 

정말 긴 글이었는데요. 글을 다시 읽어 봐야 겠지만, 일단 하루키 본인의 아버지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의 군인으로서 3차례 징집되는 시점을 중심으로 상세히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는 느낌이었고, 또 지금의 자신이 어떻게 연관 되어는지에 대해 간증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말 세세하게 숨기는 것 없이 말이죠. 이 글 <고양이를 버리다>를 통해서 하루키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본의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무라카미 치아키씨에게 자신이 겪었던 역사 속의 일들을 직시 하고 자신의 후배들에게 전해달라는 완곡하고도 간곡한 부탁으로 해석하면 너무 넘겨 짚은것일까요? 새끼고양이가 차마 하지 못한, 다시 나무 밑으로 내려가 숨기지 말고 낱낱이 과거를 들여다 보자고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현재는 백골 시체가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 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루키는 근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통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군이 중국 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학살을 자행한 난징 대학살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출간 직후 일본의 극우 세력에 의해 꽤나 큰 저항을 받았고, 그 상황은 달라진 것 없이 하루키는 틈만 나면 여러 인터뷰나 작지만 공개발언 자리 등이 있으면 계속해서 일본의 각성과 반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루키는 작가 생활을 마무리 하기전에 어떻게든 이런 자국 일본 극우 세력에 의한 역사 왜곡과 역사를 수정하려는 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점점 더 강도를 높이려는 듯 합니다. 그 방법은 하루키도 수 차례 이야기했듯, 어떤 집회나 연설이나 토론장에 나가는 방법이 아닌, 작품으로서 이야기를 하게 될텐데요. 작가로서 혹은 인생에 있어서의 앞선 선배로서 책임을 크게 느끼고 끝까지 무지한 자국민들을 일깨우는 작업을 지속하리라 믿습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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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9.10.04 15:41

    늘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