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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방 ; 슬라이드쇼

category 이야기/정다방 2009.09.20 11:28

#16.

갑자기 직장을 옮긴 박대리를 다시 본 그날 박대리는 야구 경기의 승부따윈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난 내가 응원하는 팀이 9연패를 당한 것이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닐 만큼의 심정으로 그 다음주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사표를 썼다. 팀장이 꽤 놀란 눈치였는데, "며칠 좀 쉴래?"라며 나의 의중을 떠 보았고, 난 "계속 쉬고 싶어요."라고 했다. 팀원들과 마지막으로 먹은 점심값을 치르고 책상 정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온 시간이 오후 4시 였다. 회사의 잉여자원이었을지도 모르는 나는 인수인계란 것도 전혀 하지 않고 나올 수 있었는데, 잉여자원을 빼낸 인사팀에서 꽃다발이라도 준비했거나, 인사팀장이 기분을 내 회식이라도 했을지 모를일이다. 집에는 당분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 말할 수 없다. 회사에서 친했던 한 여자 후배는 뒤늦게 나의 퇴사 소식을 접하고 문자를 보내왔다. '선배, 축하해요. 화이팅!' 희망과 절망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말이다.

#17.

회사를 그만 둔 후, 가장 먼저 나타난 이상 증상은, 매일 오전 10시 즈음 아침을 거른 공복에 허기가 강하게 밀려옴과 동시에 실시되는 '점심 뭐 먹을까?'란 선임과장의 메신저 투표에 한 표를 행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허전함이었다. 근처 대학교 열람실에 가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해보자고 마음먹은지 4일만에 열람실로 향할 수 있었는데, 점심 투표를 하지 않은 허전함은, 간밤에 먹다 남은 '치킨 날개 조각 위에 치즈를 얹어 전자렌지에 60초 돌린' 요리 정도가 채워주고 있었다. 아직 시험기간이 아님에도 열람실은 북적인다. 조직내에서 일정의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은 사실로서의 사실이다-은 9급 책을 보는 학생과 7급 책을 보는 학생이 이미 계급이 정해져버린 듯한 느낌을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회사를 3년 다니고 나온 나는 지금 몇 급 정도일까. 내 의지에 의해 넘겨졌던 슬라이드는 지금도 유효할까. 

#18.

입을 벌리고 자는 습성이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되고, 엎드려 잤을 땐 더욱 치명적이란 것도 오랜만에 깨닫게 된다. 침이 엄지손가락 두개를 모아놓은 정도의 크기로 열람실 책상에 고여 있는데, 오랜만의 낮잠이어서 그랬는지 점성이 꽤나 강하다. 결국 3시간만에 도서관에서 나와 어둑해진 거리를 타박타박 걷는다. 물론, 생각정리는 하지 못했다. 대학교 정문 앞에는 벌써 붕어빵 아저씨가 나오셨고, 팔을 에두른 젊은 커플들이 유난히 늘었다. 저녁을 뭘로 할까 잠깐 고민하다, 열람실에서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이 먹던-정확히 말하면, 먹다 버린- 맥주가 생각나, 햄버거세트와 함께 먹기로 한다. 세트에 포함된 감자튀김은 어니언링으로 400원을 더 지불하고 바꿨다. 원룸 불빛들로 둘러쌓인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맥주캔을 따고 어니언링을 케찹에 찍어 입에 넣는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어니언링은 케찹의 차가움과 어우러져 맥주 한 모금과 섞여 목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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