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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정다방

정다방 ; 하루살이

CoolCider .
#13.

기억 하고 싶은 것들을 추억이라 하고, 기억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악몽이라 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던 그런 기억들이 되살아 나는 경우는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지난 봄 대구 버스터미널 앞 던킨도너츠에서 1,200원을 주고 사먹은 츄잉도넛과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휴가 나온 군인이 어머니를 향해 '충성'을 큰 소리로 외치던 대전 버스터미널의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시점이 그것이다. 그것은 분명 내가 한 것이고 겪은 일이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은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지금 이곳 정다방에 머문지도 3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지방 대도시를 길게는 석달 주기로 돌아다니다, 혜숙이년을 만나고부터 이곳에 계속 머물게 되었는데 '정'다방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석달이 10배가 불어난 3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항상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다. 

#14.

혼자 출근 안 한것이 마음에 걸려 혜숙이년에게 전화를 한 시간은 저녁시간이 한참 지난 9시경이었다. 평상에 누워 그만 3시간을 잠들어 버린 것이다. "삐, 소리가 난 후 소리샘으로.." 이 여자의 한결같은 목소리 톤과 음색이 순간 짜증이나 얼른 핸드폰을 닫아 버린다. 정다방을 운영하는 '이모'는 밤이 되면 또 다른 술집을 가동한다. 더운 여름날 커피로 재미를 못 본 이모는 술집 운영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데, 엊그제는 혜숙이년을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실크 브라우스와 블랙 스커트를 사 입혔다. 이른 아침,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던 그 옷이 생각나 기분이 나빠졌다. 지금쯤 혜숙이년은 블랙 스커트를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가도록 다리를 꼬고 앉아 발 뒤꿈치로 힐을 까딱까딱 하고 있을 것이다. 한 여름의 매미는 늦은 시간까지 울어 제끼고, 가로등 아래 모여든 하루살이들은 주어진 생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15.

사실 누가봐도, 나보다 혜숙이년이 훨씬 미인이고, 더 중요한 사실은 나보다 세살이나 어리다는 것이다. 난 혜숙이년의 주름없는 눈가도 쌍커풀진 눈도 가는 손목과 종아리도 아닌 뽀얀 허벅지가 항상 부러웠다. 언젠가는 자다가 내 배위로 올라온 그년의 허벅지를 그만 꼬집어 버린 적도 있다. 하얀 허벅지 위의 자그마한 점은, 마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설기 속에 박힌 윤기나는 콩 같다. 그 순간 떡이 먹고 싶다란 생각을 했지만, 나가기 귀찮아 냄비에 라면물을 올린다. 혜숙이년 몰래 숨겨둔 라면은 이때 아니면 먹을 기회가 왠간해선 오지 않는다. 계란을 풀고, 대파를 썰고, 냉동고 속의 몇 개월 묵은 설날 가래떡을 물을 채운 빈 그릇에 담가 둔다. 설겆이까지 깨끗이 해 완전 범죄가 성립된 시간은 자정이 다 되가는 시간. 시계를 보니, 4분뒤면 서울로 가는 마지막 고속열차가 출발한다. 창문을 열고 턱을 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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