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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정다방

정다방 ; 차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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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황룡강과 산넘어 영산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꽤 괜찮은 풍수지리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1주일 동안 나를 설득한 혜숙이년과는 벌써 3년째 같은 티비를 보고 있고, 리모콘의 밧데리를 사러 가기 위해 한 가위바위보 수만해도 수십번이다. 생각해보면 풍수지리에 넘어간 나도 우습지만, 그런 어설픈 말로 나를 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혜숙이년도 참 귀여운 구석이 있다. 혜숙이년은 어느날 갑자기 내가 먼저 있던 곳으로 타의에 의해 흘러 들었고, 그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혜숙이년을 난 어떻게든 집에 돌려 보내려고 애를 썼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살고 있다. 그 누군가가 있기에 지금 내가 있고, 내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누군가도 역시 존재한다. 혜숙이년과 난 그런 관계다.

#8.

가운데 손가락이 계속 시리다. 편의점 깍쟁이를 제대로 혼내주지 못한게 계속 후회된다. 혜숙이년이 뛰쳐나와 말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확실히 기선 제압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간밤 룸에서 베인 가운데 손가락이 편의점 깍쟁이년 아가타 머리핀에 쓸려 피가 났다. 내 손가락의 피를 보더니, 정확히 말하면 지 머리에 피가 묻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더 소스라쳐 놀란 편의점 깍쟁이년은 '재수없어'란 말 내뱉었고 욱한난 손가락은 아랑곳 않고 달려들 찰나, 뛰쳐 따라나온 혜숙이년 덕에 싸움이 종결 되었었던 것이다. 편의점깍쟁이는 바로 물호스로 뛰어갔고, 나의 원망스런 눈빛을 알아차린 혜숙이년은 "오늘 기차엔 사람이 별로 없네"라고 혼잣말을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샌들 뒷줄을 깔아 뭉갠 하얀 뒷꿈치를 보인채 계단을 타닥타닥 올라갔다.

#.9

오늘은 그냥 쉬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역앞 광장을 지나 큰 길로 나선다. 역전 시장을 지나 중학교를 하나 지나고 아파트 단지의 쪽문으로 나간다. 이내 고추나 상추 따위를 심어 놓은 밭이 나오고, 작은 개천에 평상이 놓여져 있다. 계절은 어느덧 초봄에서 여름의 한 가운데로 들어섰고, 자전거 타기도 벌레들 때문에 힘겨울 정도로 반갑지 않은 계절이 왔다. 평상에 자전거를 기대 놓은 후, 양말을 벗는다. 양말을 둘둘 말아 주머니에 넣고 개천에 두 발을 담그고 눈을 감고, 여름은 반갑지 않지만 개천에 두 발을 담글 수 있는 점은 좋다란 생각을 하며, 발등을 치며 유유히 흘러가는 개천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재수없어'란 말과 함께 누군가에 '상종도 하기 싫은' 존재가 되어버린 누군가로서 타인과의 차원의 문제의 서걱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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